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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Nov 17. 2019

하루 아침에 시녀가 된다면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2018년 출간된『시녀 이야기』(좌)와 2019년 출간된 그래픽 노블 버전의 『시녀 이야기』(우)


# 캐나다 여성 작가가 그린 디스토피아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는 표지부터 강렬하다. 화려하지만 혼란스러운 색상의 배경에 늘어선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모두 감추고 있다. 새빨간 색상의 드레스를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늘어선 그녀들을 보는 순간, 이들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얼굴들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이 이야기 속 장면에 등장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을 읽으면 '영화(또는 드라마) 같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야기 속에서 묘사되는 색감과 공간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고 흡입력을 지녀서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나 동작까지도 상상하게 된다. 덕분에 그녀의 작품은 자주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시녀 이야기』는 2017년 훌루 방송사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올해는 그래픽 노블 버전으로도 새롭게 출간되었다. 



드라마 <Handmaid's Tale>의 장면들



#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소비되는 '시녀' 계급


21세기 중반, 전 세계적으로 출생률이 급감하면서 극심한 혼란의 상태에 빠진 미국에 극단적인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하는 전체주의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극단적인 가부장제로 하는 전체주의 세력'이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떻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극심한 혼란의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자.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개인이 애써서 팩트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만 믿게 되는 세상 정도면 충분히 혼란스럽지 않은가. 그러니까 『시녀 이야기』는 그리 멀지 않은, 우리가 발 담그고 있는 세상과 비슷한 세계에 극단적인 디스토피아적 설정을 덧입힌다.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지만 갑작스럽게 정권이 바뀌고, 하루아침에 전체주의 세력이 나라를 지배한다. 새롭게 건설된 국가 '길리아드'는 모든 권력을 남성에게 배당하고 여성은 여러 계급으로 분류해 개인적인 활동을 일절 금지한다. 여성을 계급으로 분류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재생산(임산과 출산) 능력. 주인공 '오프브레드'는 그중에서도 재생산을 위해 소모되는 '시녀' 계급이다.


시녀 계급은 임산과 출산을 하지 못하는 사령관의 아내를 대신하여 사령관과 관계를 맺고 임신을 강요받는다. 세 명의 사령관을 모실 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시녀로서의 임무는 실패한 것으로 보고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주인공 '오프브레드' 곁에는 끊임없이 저항하려는 친구 '모이라'가 있고, 반란을 꿈꾸며 힘을 기르려는 비밀조직원들도 있다. 오프브레드시녀의 삶을 살게 되면서 어떤 인물들과 만나게 되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것이 결국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지켜보는 것이 시종일관 흥미진진한 소설이었다.



# 닮은꼴 디스토피아 소설, 미셀 우엘벡의 『복종』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부 전체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다니.' 시녀 이야기에서 비극의 시작은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된다. 정부가 사라져 버리고 이해할 수 없는 질서가 사회를 잠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시녀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들, 그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 많이 떠올랐다. 특히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비교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미셀 우엘벡의 복종이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복종에서 극우 정당이 정권을 잡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나머지 정당들이 차선을 선택하고 동맹을 맺으면서 이슬람 정당을 밀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국민의 30프로 이상을 차지하는 이슬람 교인들의 힘을 얻어 이슬람 정당 대표가 선거에서 승리한다. 선거가 진행되고 이슬람 정당 대표가 대통령에 오르는 과정에서, 대학 교수인 주인공 '프랑수아'는 커다란 사회 변화가 닥치기 직전 사회에 흐르는 미묘한 기운을 감지한다.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던 교수들 중 일부가 조용히 사라지고, 만나고 있던 여자 친구는 다른 나라로 떠난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나라는 급격하게 이슬람 정당이 원하는 쪽으로 변화하는데, 그 첫 번째가 모든 교육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이 깨지고 초등·중등교육의 모든 공립학교가 이슬람 학교로 바뀐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교수와 교사들은 개종을 해야만 직장을 유지할 수 있고,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들은 어느 날부터 모두 히잡을 쓰고 다녀야만한다. 수업 내용도 교리에 맞게 편집된 내용들로 바뀌고 정체모를 누군가에 의해 모든 것이 감시되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 그들은 차근차근 준비해 온 거야


복종시녀 이야기의 중요한 공통점은 작품 속에서 그리는 사회상이 급격한 변화로 인해 일어났고 그것이 막을 수 없는 정치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었다는 점이다. 시녀 이야기에서 모이라는 중요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이 사태를 차근차근 준비해 온 거야.'


하루아침에 나라가 바뀐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는 것이 지나친 설정일까? 사실은 '하루아침에' 바뀐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이라의 말처럼 구멍가게 카운터의 주인이 바뀌고 직장에서도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무슨 일이지?'하고 어깨를 으쓱하는 사이 일상 속 풍경들은 사소하지만 확실하게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프 브레드를 포함한 사람들이 갑자기 사무실에서 쫓겨나 도서관 계단에 모여 앉았다. 충격과 허망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저 상황에 쳐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시녀 이야기』에서는 군대가 대통령을 쏘아 죽이고 의회를 점령하긴 했지만, 그것은 수습한 전체주의 세력은 계엄령과 언론 폐지를 이용해 또 다른 왕국을 세웠다. 극심한 혼돈의 사회에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처럼 보이는 것들이 나의 자유를 제한하고 '시녀'로 살게 만든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저항할 수 있었을까.


사무실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던 장면으로 돌아가, 오프브레드가 순순히 쫓겨나지 않고 횡설수설하며 정신 나간 관장에게 조목조목 따지면서 사무실에 남았다면? 기관총을 든 군인들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인들에게도 목소리를 높여 저항하다가 어디론가 끌려갔다고 하자. 거기서 나의 권리를 이렇게 제한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는 것보다 쉽다. 자유는 어리둥절하는 사이에도 뺏길 수 있지만 그것을 다시 얻어내기 위해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것이 내 끝이 될지 새로운 시작이 될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 그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암흑으로 아니 어쩌면 빛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갇혀버린 것을 인정하고 나면, 거기에 적응하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걸까. 소설은 1인칭 시점에서 서술을 이어가기 때문에 오프브레드의 독백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의심의 촉을 세우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는 사령관에게 더 많이 의지하고, 사령관 밑에서 일하는 '닉'과의 관계를 통해 실제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자신을 '이렇게 게을러져 버렸다'라고 표현한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려다 잡히고, '시녀'가 되어 사령관에게 종속된 존재로 변하기까지 모든 부조리한 상황을 민감하게 인지하고 비판하던 그녀가 변해가는 긴 과정을 목격하고 나니, 독자로서도 회의감이 찾아온다. 오프브레드를 포기해야 할까? 오프브레드에게 다가오는 닉을 믿어야 할까? 내가 만약 길리아드에서 산다면? 현실에서 우리는 오프브레드와 얼마나 다른가? 둔감한 것은 내가 아닐까? 소설 속 이야기에서 시작된 질문을 결국엔 현실 속 나에게도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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