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Maxwell Coetzee', 우리말로는 존 맥스웰 쿠체 또는 쿳시라고 불리는 작가는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194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의 아들, 즉 '아프리카너'의 후손으로 태어나 케이프타운에서 대학을 나올 때까지 남아공에서 자랐다.
'아프리카너'라는 말은 작가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큼이나 낯설었다. 아프리카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은 '아프리카너'가 사실은 남아공에 거주하는 네덜란드계 백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고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작품을 읽기도 전에 나는 '아프리카너'라는 단어에 의문을 느끼고 남아공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1488년 포르투갈 선원이 남아공을 발견해 유럽에 알린 뒤 1650년대 무역 보급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온다.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스스로를 '농민'이라는 뜻의 '보어'라고 부르며 남아공에 자리를 잡았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이 과정에서 남아공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쟁은 백여 년 이상 치렀다.
그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뒤 영국은 남아공을 식민지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군대를 포함한 5천여 명의 사람들을 이주시킨다. 이로써 남아공에는 원래 이곳에 거주하던 줄루족을 비롯한 원주민들과 보어인(네덜란드계 이주민), 그리고 영국인들의 불편한 동거가 완성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남아공을 차지하기 위한 영국과 보어인의 다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1899년 보어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크게 벌어졌고 여기서 영국인들이 승리하면서 남아공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보어 전쟁 이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전쟁 전 케이프 타운을 먼저 차지한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하자 보어인들이 극심하게 반대하면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하디만 보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고 식민지배를 시작한 뒤 인종 차별을 시작하고 그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까지 이어졌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식민지배를 당하는 국가의 변방 작은 도시를 관리하기 위해 파견된 치안판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치안판사는 나름 자신이 다스리는 공간에 온화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실제로도 변방의 작은 도시는 나름의 평화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성 밖의 '야만인'들이 무장을 하고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출처도 불분명하고 아무도 소문의 실상을 확인할 수 없지만 정체모를 공포는 계속 고조된다. 결국 소문의 실체, 야만인을 찾기 위해 수도에서 '졸 대령'이 파견되고 치안판사가 이룩한 제국은 산산조각 난다. 결국 야만인을 찾으려던 작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야만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 야만인 대신 제국의 민간인들만 괴로워질 뿐. 작가는 끝까지 어느 국가, 어느 도시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 막연하게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배를 받았던 어느 곳이라면 어디든 대입시킬 수 있는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 제국의 변방을 다스리는 치안판사
『야만인을 기다리며』에는 상징과 은유로 읽어낼 수 있는 장치들이 여럿 등장한다. ‘제국’과 ‘제국의 변경’이라는 지역, 감옥과 야생의 환경이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치안판사와 줄 대령, 눈먼 그녀, 만델 준위 같은 인물들처럼. 그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목소리의 주인공, 치안판사 ‘나’였다. 작품에서 그는 유일하게 입체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는 시간은 치안판사 ‘나’를 얼마만큼 믿고, 동조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과 같았다. 그의 대사와 행위들을 보면서 ‘나는 그에게 이만큼 동조한다’고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치안판사 ‘나’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도 그만큼 많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제국의 변방에서 지정된 구역을 잘 다스리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의 생활은 업무 이외에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가득했다. 그중에서 하나가 ‘폐허를 발굴하는 것’이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폐허를 발굴해내는 데 다양한 인력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발굴해낸 결과도 대단할 것은 없지만,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잔재들을 보면서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공간이 사실은 어떤 의미였고, 과거에는 어떤 행위들이 일어난 곳이었을지 마음껏 상상하는 행위가 그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보인다.
치안판사의 면모를 설명해주는 또 다른 장면은 새끼 여우를 키우는 장면이다. 그는 사냥꾼에게서 작은 은빛 새끼 여우 한 마리를 산다. 야생 동물인 여우가 판사의 공간에 적응할 리가 없었지만 방생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위층에 가둬주고 보살핀다. 새끼 여우가 하루 종일 가구 밑에 웅크리고 숨어있으면 치안판사를 모시는 직원들이 여우의 배설물을 치우고 먹이를 준다. 여우의 시큼한 오줌 냄새가 아래층까지 느끼면서도 그는 ‘여우가 어서 커서 내보낼 때를 기다린다’고 읊조린다.
# 그가 만드는 또 하나의 제국
폐허를 발굴하고, 새끼 여우를 키우는 장면은 이 작품을 통틀어서 그가 가장 많은 정성을 쏟아붓는 ‘그녀를 보살피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치안판사는 고문을 당한 뒤 가족들을 잃고 거리에 버려진 그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숙소로 데려온다. 그곳에서 따뜻한 공간과 일거리를 제공하는 대신 그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그녀의 발을 씻겨주는 것. 처음에는 그녀의 발을 씻겨주는 것에서 시작한 것이 점차 그녀의 온몸을 씻겨주는 것으로 발전한다. 매일 밤 반복되는 이 행위가 성관계로는 이어지지 않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홀경’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녀를 씻겨주며 황홀경을 느끼는 이 장면들이 이상한 불쾌감을 불러왔다. 작품 속 주변 인물들도 수군거린 것을 보면 둘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녀에게 살기 좋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대신 그가 황홀경을 얻는 과정이 불편한 것은 왜일까? 치안판사의 행위가 애정이나 연민에서 비롯되기보다 강요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둘의 관계에서 그녀가 완벽한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제대로 볼 수도 없고, 그 외에도 건강 상태가 양호하지 않다. 가족을 잃었고 머물 곳이 없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다. 반면에 치안판사는 행정구역 내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거리에서 처음 ‘가자’고 말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치안판사는 폐허를 발굴해내고 새끼 여우를 키우듯이 그녀를 데려와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에게는 그런 일들이 자신만의 제국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는 이런 행위를 스스로 ‘보살핌(p.58)’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치안판사가 제국의 반대 입장에 서서 야만인을 보살피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그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인물로, 줄 대령이 처음 시찰을 나왔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주장한다. 소년과 잡혀 온 죄수들이 줄 대령에게 고문을 받고 난 후에도 망을 보던 병사들에게 당시 상황을 캐묻고, 눈먼 그녀를 위해 수행대를 꾸려 사막 너머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사막 언덕에서 그녀와 동족으로 추정되는 무리를 만났을 때, 치안판사는 그녀에게 ‘스스로 선택해서’ 도시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단호하다. “싫어요.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p.119) 결국 그는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를 자신의 제국에 가둔 것인가.
희랍어에서 ‘야만인’의 어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자들’, 혹은 ‘미확인된 적’을 뜻한다고 한다. 존 쿳시가 영감을 받았다는 콘스탄틴 카바피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는 집단이 쉽게 ‘적’으로 삼는, 해결책으로서의 야만인을 보여줬다면,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는 조금 더 입체적인 인물인 ‘치안판사’가 더해져 우리가 기다리는 ‘미확인된 적’의 존재가 더욱 복잡해진다. 작가는 소설의 배경을 특정 국가가 아닌 ‘제국’이라고 명명하면서 이것이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공간임을 암시했다. 이에 더해 치안판사라는 인물을 통해 제국은 외부의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자신만의 제국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 것 아닐까? 치안판사는 졸 대령을 ‘적’이라고 명명(p.188)하고 자신의 제국을 다시 찾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야만인’은 누구일까. 오늘, 당신의 제국은 안녕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