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언덕 풍경』, 가즈오 이시구로
# 트라우마 종합세트
『창백한 언덕 풍경』은 트라우마 종합세트다. 극심한 충격,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불안을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증상들이 있다.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아무 말을 하지 못하거나 대화 상황에서도 육체와 정신이 얼어붙은 것처럼 마비 증세에 시달린다. 악몽과 환영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고, 때로는 그 일이 발생하기 이전과 이후를 나눠 자아를 분리시켜 버리기도 한다. 그 일이 발생한 곳을 떠나 삶의 배경을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환상을 갖고, 원하는 대로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경우도 많다.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 대부분의 서사를 차지하는 마리코, 사치코, 에츠코에게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오가타상과 에츠코의 반응이었다. 오가타상은 과거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전쟁 이전, 원폭 투하 이전 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문화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강하게 비판하는 시게오에게 큰 반감을 느낀다. 최대한 드러내려고 하지 않지만 잊을만하면 시게오 이야기를 꺼내면서 기어코 그를 찾아가기까지 한다. 시게오를 만나서 그에게 칼을 꽂거나 어떤 해를 가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데 막상 오가타상이 시게오를 만나는 장면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까지 시게오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게오에게 부정당한 엔도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엔도는 잘 지내는 것 같더구나. 하지만 일을 하고 싶어 해. 요컨대 남자에게는 일하는 게 곧 사는 거니까."(p.44) 평생을 바친 '일'이라는 것이 오가타에는 '사는 것', 즉 생명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시게오는 논리적인 분석으로 과거의 문화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했겠지만 오가타에게는 그것이 목숨과도 같은 의미이기에 논리적으로 반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주인공 '나', 에츠코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집착이 발견된다. 에츠코가 사치코와 이야기를 하든, 다른 부인과 이야기를 하든, 아니면 시아버지 오가타와 이야기를 하든 간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슈는 에츠코의 뱃속에 있는 아기다. 아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 뒤에 모성애나 좋은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에츠코는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힌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것도 오가타상이 시게오에게 가졌던 집착과 같은 생명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정확한 장면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에츠코도 원폭 투하로 인해 소중한 이(아마도 나카무라상)를 잃었다. 하루아침, 아니 단 몇 초만에 자신이 알고 있던 생명들을 지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면 자연스럽게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사라진 생명과 살아남은 생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사람은 죽었지만 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폭 이후 나가사키에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민과 질문이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 머릿속을 채웠을 것이다. 내가 살아야 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오가타는 과거의 가치에 집착하고, 에츠코는 새로운 생명과 모성애에 집착하게 된 것이 아닐까.
# 이제 당신 계획은 뭔가요
개인적으로 질문을 던져주는 책을 좋아한다. 책을 읽을 때도 떠오르는 질문들을 항상 메모하는 편인데, 이 책은 중반 정도 읽고 있었을 때 책의 주인공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분명 한 명의 등장인물이 또 다른 인물에게 던지는 질문인데 나에게는 작가가 지면을 뚫고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윽고 내가 물었다. "이제 당신 계획은 뭔가요?"
"내 계획요?" 사치코는 찻주전자에 물을 채운 다음 남은 물을 불꽃 위에 부었다. (p.113)
이 장면에서 나는 숨이 막혔다. 작년이었나, 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한창 간절했던 어느 날, 어떤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어느 빌딩이었는지, 어떤 약속의 자리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엘리베이터 앞의 작은 거울을 보면서 내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물어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조차.
내가 바라보는 하늘 어딘가에서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을 상상해본다.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한순간에 터지고 무너져서 사라져 버리거나 조금 천천히 녹아내리며 사라진다. 시뻘건 색상이나 무채색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그 와중에 살아남은 존재들은 각자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시간을 견뎌야 한다. 내가 '살아남은' 것도 아니라 내가 '산' 이유를 되물으면서.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 쫓고 쫓기는 추리소설처럼 스릴 있고 공포소설처럼 오싹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한없이 정적인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사치코의 이야기를 따라온 독자라면 어떤 계획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치코는 사치코만의 계획이 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했잖아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딸의 행복이라고요." 시간이 흐른 뒤 에츠코도 니키에게 말한다. "너는 네가 선택한 대로 살아야지." "넌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창백한 언덕 풍경』은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가사키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일본을 떠나 영국에 정착하고 난 뒤 새로운 남편과 낳은 완벽한 영국인인 니키도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화목하지 않았던 가정과 언니의 죽음 이후, 니키도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에츠코가 아직도 게이코에 대해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는 것과 달리 니키는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꺼낸다. 자신에게 아픔과 스트레스를 주는 집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자신만의 뿌리를 내리고 확실한 선을 긋고 있다. 니키처럼 독립해서 옛 가정과 거리를 지키며 사는 여성이 쓴 글을 얼마 전에 읽었는데 거기서 '나는 서른이 되어서야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니키는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조금은 희망적인 미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의 제목 'A Pale View of Hills'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pale'을 어떤 단어로 번역할 것인지가 주요한 문제였던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고민이 당연하다고 공감하게 된다. 제목에서 말하는 언덕 풍경을 떠올렸을 때 하나의 언덕 풍경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과 원폭이 지나간 이후 무채색으로 가득한 세상의 언덕 풍경이기도 하고, 에츠코가 니키를 떠나보내고 바라보는 언덕 풍경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창백한'이라는 단어가 선택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창백하다는 것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희망적인 언덕 풍경까지 포함한 것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