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e to be vulnerable
버-너러블, 엘(l)이 있지만 아주 약하게 발음되서 거의 묵음에 가까운 이 단어.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 상처입을 수 있는 용기.
삶을 천천히 거닐어야 해낼 수 있는 숨쉬기가 있는 것처럼,
상처를 입어야 해낼 수 있는 셈법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vulnerable을 검색해보면 여러 뜻이 나오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의미가 가장 좋다. "capable to be susceptible of being (physically or emotionally) wounded or hurt.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상처입을 것에 민감할 수 있는-"
이 단어는 open, honest, authentic, sincere 등의 형용사들과 함께 종종 사용되는 것 같다. 물론, 통계에 의한 수치는 아니고, 순전히 내 데이터에서 뽑아온 형용사 사용빈도이므로 매우 주관적인 주장이다. 듣기만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단어들.
그저 객관적인, 일차적인 의미의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으로 간단히 해석할 수도 있지만, 간혹 버-너러블은 조금은 다층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위의 정의가 사용한 capable처럼, 기꺼이 상처입을 수 있는 능력, 혹은 용기, 여러 갑옷을 단단히 껴입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꺼이 옷을 벗을 수 있는 용기, 이토록 가난하고 벌거벗을 수 있는, 상처입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실(authentic)하고자 하는 용기를 버-너러블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온통 가면을 쓴 이들 틈에서 혼자 맨얼굴을 보일 용기, 온통 가시로 몸을 감싼 이들 틈에서 혼자 맨살을 드러내어 가시를 안을 용기, 그렇게라도 심장과 심장을 마주대어 연결되기를 원하는 용기를, 버-너러블은 표현해낸다. 결국 이렇게 표현하는 이 단어의 뜻은 '너와 내가 마주하기를 원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버-너러블은 open (마음을 열고), honest(정직하게), authentic(진짜로), sincere(진실하게) 나를 열고, 그렇게 너를 만나고, 세상을 만나는 용기를 의미한다.
"Being vulnerable is the only way to allow your heart to feel true pleasure."
(연약함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Bob Marley -
어쩌다보니 우리는 연약해질 수 있는 용기를 찬양하는 시대를 살고있다. 마치 노스탤지어처럼 너도나도 어떻게하면 우리는 좀 더 '용기있게' 연약해질 수 있을까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왜 이토록 연약함에 향수를 느끼는 걸까. 우리는 왜, 기꺼이 상처받고 싶어하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보호되지 않은 우리의 연약한 피부를 드러내는 순간을 사랑한다.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선율에 예상치 못한 전율이 이는 순간, 우리의 피부는 마치 약한 전기에 감전된 듯 살갗의 털들을 가볍게 세운다. 예상하지 못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우리의 여린 피부. 이토록 우리는 연약한 존재다. 우리가 연약하기를 갈망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피부의 털이 가볍게 서는 그 순간의 느낌, 세상이 잠깐 멈춤 버튼을 누른듯 숨을 죽이고, 그 한순간을 영겁처럼 충만히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자극을 느끼고 싶어서, 우리는 연약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선별할 수는 없다. '외부'는 철저히 타인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전해지는 자극은 좋을 수도, 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겁처럼 충만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나쁜 자극도 감수할 용기를 가져야 진정으로 연약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연약해질 용기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강한 용기를 전제한다.
나는 버-너러블한 사람이다. 갑옷을 다 벗고 땅바닥에 앉아 모래 장난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기를 사랑한다. 세상 먼지를 수북히 뒤집어 쓴 땀에 절은 가면을 벗어놓고 보송한 맨얼굴을 내어놓고 상대와 만나는 것을 항상 꿈꾼다. 마치 영혼에도 닮은 꼴이 있다는 듯이 타인에게서 내 영혼의 닮음을 찾아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나도 한 겹 두겹 가면을 주섬주섬 쓰고, 갑옷을 어깨에 걸치고 있다. 어느새 몇해를 지난하게 써서 가면이 얼굴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들 틈에서 가면을 벗을 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 바쁜 인생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땅에 그림을 그리며 소담소담하게 이야기를 나눌 저녁 한 짬을 내는 것도 꿈같은 일이기도 하다.
새해에는, 조금 더 버-너러블하기를.
조금 더 용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