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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an 23. 2019

초짜 번역가로 살아보기

레드오션이라는 번역가의 세계


기나긴 워킹 비자 홀더로서의 삶을 마치고 이제 내 본업이 아닌 알바를 해도 법적으로 인정되는 영주권자가 되어서 그동안 손 놓았던 번역일을 다시 시작했다. 몇 년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잘 못하므로 나는 초짜 번역가이다. 

워낙  번역을 좋아했다. 믿거나 말거나 번역은 수학같이 딱 떨어지는 데가 있는 터라  뭔가 퍼즐의 아귀가 맞아 들어갈 때 느끼는 짜릿함을 준달까. 자투리 수입에 더불어 느끼는 그 작은 성취감이 좋다. (물론 나는 부가수입원으로 번역을 하므로 자투리 수입이지만 번역만으로 프리랜서로 아주 잘 사는 분들도 많다) 오래전 유학을 잠시 쉬고 한국에 있을 때 우연히 시작한 논문 extract 번역 아르바이트로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다.   

번역일에도 당연히 여러 가지 분야가 있는데, 예를 들면 내가 처음 시작했던 논문 초고 영문 번역이나, 책 번역,  혹은 내가 지금 하는 웹사이트 번역 등등이다. 요즈음은 넷플릭스 등의 발달로 영상 번역도 한창인듯하다. 영상 번역은 특히 문화를 번역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아주 어려운 것 같길래 도전도 안 해봤다. (해볼까)   예전엔 한참 특허 관련 번역일을 하기도 했다. 의외로 법적 용어들이라 번역이 매우 쉽다. 의역이나 문화적 함의를 수용한 언어적 감수성을 요구하지 않고 언어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표현들이라 번역가는 아마 대부분 매우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분야인듯하다. (그리고 Google Translate이 아주 이걸 잘 해냅니다. 으뜸가는 도우미) 


요새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한 번역을 검수하는 에디터 일이다. 한국에 사이트를 처음 론칭하는 한 패션회사의 2019 봄-여름 신상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로, 다른 번역가가 번역한 초벌을 다시 한번 수정하는 역이다. 패션업계 일은 처음이라 처음에 매우 긴장했으나 생각보다 쓰이는 단어가 제한되어 있고 한국어로 우아하게 번역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즐기고 있다. 또 회사마다 번역문화가 다른데 이 회사는 많이 빡빡하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영어보다 한국어를 잘해야 좋은 번역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패션 관련 번역에서는 보통 3-4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짧은 카탈로그의 설명을 얼마나 주어진 단어 제한 안에서 잘 해내느냐가 관건이다. 한국어로 읽었을 때 잘 읽히면서도 단어나 묘사가 유려해야 한다. 번역이 너무 짧게 끊어지면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느낌을 주고, 너무 길어지면 가독성이 떨어진다. 또 패션업계이다 보니 어법상 맞지는 않지만 용인되는 영어적 표현들을 허용한다. 이런 몇몇 조건들을 충족하면서도 그 제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도 살리는 번역을 해야 한다. 

내가 에디팅을 하는 번역가 중에는 간혹 토씨 하나도 고칠 필요가 없는 좋은 번역을 하는 번역가들이 있는가 하면 전체를 재조합해야 하는 번역가들도 있다. (아니 이 사람은 테스트를 어떻게 통과한 건가 싶을 정도로) 영어 번역은 이미 번역가들이 넘쳐나는 포화상태의 레드오션이다. 영어만큼 흔한 언어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래도 아직은 영어가 전 세계 공용어인 만큼 저가 경쟁이 심화되는 한은 있어도 영어만큼 일거리를 찾기 쉬운 언어도 없는 듯하다. (중국어가 조금 나을 수는 있겠다) 다만 그 안에도 레벨의 차이는 존재한다. 우수한 번역과, 그저 그런 번역, 그리고 아니 무슨 이런 번역을! 싶은 번역. 그리고 그 차이는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 실력에 달렸다.   

한 번은 호텔 관련 번역을 하는데 한 번역가가 이런 번역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구나 싶은 번역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영어 표현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두 들어가 있으면서도 한국어로 읽었을 때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아무래도 호텔 관련이다 보니 미사여구가 많은데 그 많은 형용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춤을 추듯 어우러져 있었다. 와, 번역의 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번역은 내 모국어 실력에 달려있다.


번역을 하면서 느끼는 두 번째 점은 "한국 회사보다 외국계 회사가 조건이 더 우수한 편이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니 한국 회사들이랑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환율 탓인지 페이 조건이 더 좋고, 또 외국계 큰 번역 회사들인 경우 더 좋은 클라이언트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큰 외국계 회사와 1년 단위로 프리랜서 계약을 하는 경우, 번역 납기일을 잘 지키고 품질(번역 품질)이 고르면 무리 없이 계약 연장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큰 회사이므로 꾸준히 일이 들어오므로 어느 정도의 수입 안정성은 보장되는 셈이다. 그러니 결국 프리랜서로 일하면서도 생활의 유지가 가능하다. 즉, 번역일을 하려면 이왕이면 외국계 큰 번역회사의 프리랜서 계약자가 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다. 참고로 프리랜서이므로 여러 번역회사와 계약을 맺어도 된다. 번역회사는 일을 물어다 주고 번역자는 번역을 납품하는 구조이다. 물론 나처럼 자투리 시간 활용과 엑스트라 수입을 위한 경우에는 딱 할 수 있는 만큼의 번역만 받아서 하면 된다. 


 번역 일의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와 상관없이 일을 수주하고 페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인데, 프리랜서의 노매드 라이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좋은 부분이다. 그러나 일의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렇게 큰 회사-일감 수주가 꾸준한 그런 회사-와 계약을 맺으면 안정적으로 수입이 생긴다는 큰 장점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일하는 자들의 로망인 이번 달은 프랑스에서 일을 하고, 다음 달엔 스페인에서 일을 하지 뭐, 하는 식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해진다. 또 일을 잘하면(번역의 품질이 좋으면) 번역회사 담당자들이 일감을 계속 물어다 주고, 작년에 했던 회사의 업데이트 본을 다시 나한테 맡긴다던가 하는 식으로 계속 일을 이어나가기도 쉽다. 


물론 책 번역이나 영상 번역은 또 다른 이야기다. 책은 정해진 시간 안에 전체 페이지를 마감해서 넘겨야 해서 번역 품질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고 들었다. 그렇다 보니 간혹 번역의 실수도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은 해외 상을 노리는 경우에는 출판사에서 의도적으로 역량이 좋은 번역가를 선정해 원본의 의미에 충실하되 영어적 표현이 출중한 번역물을 내놓기도 한다고 들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처럼) 


영상 번역은 문화를 옮겨야 하고, 간혹 영어로 말장난(pun)하는 대사들을 간결하되 자연스럽게 옮겨야 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작년 여름 토르:라그나로크를 영화관에서 보는데,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토르가 무스펠하임의 던전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등장했다. 그 괴물이 쿵쾅거리며 던전에 들어와서 토르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Thor.... Son of Odin." (토르..... 오딘의 아들)이다. 그러자 그에 대답하는 토르의 말이 "무스펠하임..." 이렇게 부르고선 "Son of...." 하면서 말을 잠깐 줄인다. 그래서 영화를 보던 방청객들 모두 순간 '아 저 괴물도 누군가의 아들인가 보지?' 하면서 그다음 단어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토르의 말은 ", son of...... bitch"(개자식)였다. 관객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신박하게 말장난한다며 좋아하는 부분이었는데, 나는 웃으면서도 '와, 이거 한국어로 번역하려면 대체 번역가가 어떻게 했으려나'하며 걱정(?)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번역이 제대로 안됐다며 한 소리 들은 부분이라고 한다. 한국어와 영어의 어순이 달라서 토르가 한 말장난을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싶긴 하다.


번역은 "한 세계와 다른 세계의 접점을 찾아주는 다리"인 것 같다. 단어 하나가 가진 문화와 역사가 다른데, 그에 준하는 의미를 가진 표현을 다른 세계관에서 가져와 알맞은 다리에 그 다리를 잘 놓아주는 것이다. 그 다리가 좋은 곳에 잘 놓이면 부담 없이 그 다리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이고, 잘못된 곳에 놓이면 그 다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느낀다. 

레드오션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만큼의 수요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하는 시간과 분량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만큼, 추가 수입원으로서 번역일만큼 매력적인 일도 드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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