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을 놓고 가을을 즐기다.
내가 있는 시골 마을은 이 깡시골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로 심지어 근처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동네다. 기본 행정구역이라면 으레 존재하는 우체국이나 학교가 없는 건 물론이고 작은 식품점조차 없어서 장을 보려면 15분 정도 운전을 해서 나가야 한다.
한국에서도 계속 서울과 위성도시들에서 살고, 학교와 직장도 서울이었던 데다 미국에서도 계속 시카고라는 메트로폴리탄과 그 근교에서 살았던 나로서는 시골라이프에 적응하는 게 그야말로 어드벤처였다. 지난 한 해, 참 다사다난했다.
시카고에서 고된 유학생활을 하면서 얻은 것은 비싼 등록금과 맞바꾼 학위와,
아직 잠이 덜 깬 내 몸에게 주사를 한 대 놓는 심정으로 마시는 아침의 스타벅스 strongly brewed 커피인데,
심지어 이 시골에는 스타벅스 마저 없다. 시카고에는 맥도날드보다 많은 게 스타벅스였는데,
스타벅스가 없다고? 처음 이 사실을 깨닫고는 공포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내 카페인은 누가 책임져...?
다행히 15분 장을 보러 나가서 만나는 이 로컬 커피숍에 스타벅스처럼 강한 맛은 아니어도 나름 내 입맛에 맞는 맛있는 커피를 찾으면서 내 공포는 지난 일 년간 조용히 감소되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말도 안되게 압승하는 이 시골 마을에서,
아시안 여자로 살아가면서,
그래도, 지난 일 년을 되돌아 생각해보면,
'정말 좋았다'로 평가를 매길 수 있겠다.
평소 레드넥(붉은 목, 하루 종일 필드에서 일을 해서 목덜미가 붉어진 미국 농부들이나 lower class 사람들을 일컫는 비하적인 표현)에 대한 편견이, 도시 사람으로서, 조금 있는 편이었다. 말하자면, 트럼프가 압승하는 것만 봐도 "것 봐 레드넥들 선택이 다 그렇지 뭐."라고 아주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살아본 이 시골은, 훨씬 더 다양한 레이어와 문화, 서로 다른 이해들이 겹쳐 있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힙(hip)하고, 쿨하고, 레트로하면서도 eco-justice에도 관심이 있어서 붉은 고기는 먹지 않고 야채만 먹는 이 뭐랄까, 오히려 위선적으로 느껴지기까지하는 시카고의 식자층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그래 나 레드넥이다 뭐 어쩔래?" 스피릿으로 무장했으면서도, 시골 특유의 정과 다정다감함이 묻어나는 사람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수없이 다정하게 오늘 하루를 나누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 "고기를 안 먹고 어떻게 살아?"라며 일주일이 멀다하고 그릴링을 하려고 불을 피우는 사람들.
처음에 와서 타이 누들을 요리해서 교회 미팅에 갔더니 한번도 타이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 새우와 두부, 생선요리에 기절을 하는 이 미국 중서부 시골 양반들.
시카고에서 문화 좀 아네, 공부 좀 했네 하는 사람들에게 두부 먹는 것은 건강에 좋은 exotic Asian culture를 쿨하게 수용한 뭐 그런 젠 체 하는 문화였는데 이 사람들은 기절초풍이다.
아 문화충격.
그러나 나 참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
아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유독 좋은 사람들인 탓도 있겠지만.
이 시골 정신을 사랑한다.
남의 일을 자기 일 생각하듯하며, 서로를 자신을 사랑하듯 아끼는 그 다감한 정이 참 좋다.
시골 할머니들은 마치 내 할머니를 만난 듯 하다.
이 시골과 사랑에 빠졌구나.
참 좋구나.
벌써 두번째 가을, 작년엔 한국에 있느라 보지 못한 이 곳의 첫 가을을 이제 마음껏 만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