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솦 솦 Jan 13. 2019

그린 북

스포일러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스포일러 그 자체)

*스포일러가 엄청 많습니다. (아예 거의 줄거리를 가져왔어요) 그러니 원치 않으시면 살짝 닫으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내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비고 모텐슨의 강한 이탈리아 악센트가 있는 영어와 마허샬라 알리의 완벽한 (백인 악센트의) 영어였다. 60년대에 완벽하게 우아한 상류 백인 악센트를 쓰는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니..! 저 시대에 저런 흑인이 가능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영화 시작을 인상 깊게 지켜봤다.

"닥터 돈 셜리"라고 소개하는 마허샬라를 두고 "아니 의사도 아닌 게 왜 자기를 닥터라고 부르냐?"라고 대화를 하는 토니와 토니의 아내. 60년대 하류층이었던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탈리안 가족답게 깨알같이 계속 미트볼 스파게티를 먹고 날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카드도 치고 수다도 떤다.  대식가에, 미식가에, 대가족에, 시끄러운 이탈리아 가족이라는 이미지가 정겹다.


인종차별주의자인 토니와 흑인이지만 토니의 모든 것을 앞지르는 돈 셜리의 여행.

60년대 클래식카의 슬릭한 아름다움과 늦가을의 자연이 어우러지는 로드트립.


그리고 돈은 심지어 클래시스트! (Classist: 계급 차별주의, 계급적 편견을 가진) 토니의 이탈리안 성이 사람들이 발음하기 힘들다며 함부로 다른 성으로 부르지를 않나, 토니의 악센트 (정확히는 인토네이션)가 사람들에게 불편감을 줄 수 있다며 바꾸라고 조언한다. 돈은 흑인으로 태어났지만 흑인의 문화도, 노래도, 악센트도,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흑인의 몸에 담긴 백인이랄까. 그의 정서도, 언어도, 생각도, 문화도 모두 백인의 것이다.


돈의 콘서트는 백인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바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그들의 운전수는 온통 흑인이다. (그 와중에 혼자 하얀 토니) 심지어 돈은 평생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은 먹어본 적도 없다. (대박) 그릇과 유텐실 없이는 뭘 먹어본 적도 없단다. 그런 그에게 닭다리 하나를 던지듯 건네는 토니와 어쩔 수 없이 받아먹는 돈. 다 먹은 후 닭다리를 창밖으로 던지며 함께 즐거워하는 둘은 귀엽기까지 하다.


백악관에서 지난 1년 반 동안 두 번이나 연주한 천재 피아니스트이지만 남부로의 여행은 돈에게 다른 차원의 세상을 보여준다. 일류급 호텔에만 묵던 돈이었지만 남부로 가면서 흑인들만 투숙이 가능한 ("For Colord Only"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는) 싸구려 모텔에만 묵는 것이 허락된다. 시대 배경 상 아직 segregation (흑백 인종분리정책)이 유효할 때였던 것 같다. 흑인인 돈에게 남부에서는 일류급의 호텔은 허용되지 않는다.

흑인들이 가득한 호텔이 낯설었던 돈은 가까운 바를 찾지만 백인 전용이었던 바에서 그는 낯선 백인들로부터 일방적인 린치를 당한다. (그 와중에 바 뒤에서 샷건 나오는 남부의 위엄)


노예제가 폐지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남부의 흑인들은 아직도 남루한 옷차림으로 하루 종일 뙤약볕에 밭을 매고, 잘 차려진 정장을 입은 돈은 그들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콘서트를 하던 남부 저택에서 실내의 화장실 사용을 허락받지 못해 30분 거리의 모텔에 가서 화장실을 쓰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돈. 실내 화장실을 가려고 하니 잘 차려입은 저택의 주인이 돈에게 바깥에 있는 허름한 흑인 전용 화장실로 그를 안내하고, 돈은 차라리 호텔에 가서 화장실을 쓰고 다시 오겠노라고 나름 선전포고(?)를 하지만 집주인은 "그럼 우리가 기다릴게"하며 그를 보내버린다.

그냥 대강 숲 속에서 볼일을 보라는 토니의 말에 "숲 속에서 볼일을 해결하는 건 동물들이나 하는 짓이야"라며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는 돈. 길 가에서 볼일을 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은 토니는 당최 그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끝까지 목을 꼿꼿이 세우며 타협하지 않는 돈은  어쩌면 인간이 아닌 취급을 받던 당시의 자신의 인종에 대해 끝까지 '인간적'이려고 싸우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백인이라 함부로 살아도 인간일 수 있는 토니와, 자칫 실수하는 순간 바닥의 티끌과도 다를 것이 없는 하찮은 흑인인 돈의 존재론적 차이가 나타나는 지점이랄까.) 매일의 일상 속에 일어나는 그의 전쟁이 눈물겹다.


21세기인 지금도 흑인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 부모로부터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공공장소에서는 후드를 쓰지 않는 것과,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한다. 경찰이 과속으로 차를 세우면 서로 농담을 건네는 백인들과 달리 흑인들은 경찰에게 극존칭을 쓰며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미국에서는 연간 백인에 비해 3배에 넘는 흑인들이 경찰에 의해 사살당한다.)




영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던 부분은, 돈이 토니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주는 장면이었다.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돈에게 토니가 왜 이혼했냐고 묻자 차가운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며 피아노와 남편을 둘 다 할 수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후 어느 날 아침 레스토랑에서 아내에게 아무 말 대잔치로 편지를 쓰는 토니를 보더니 돈이 내가 한 말을 받아 적으라며 대신 읊어주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남자, 너무 스위트하다. 영화 보던 내가 심쿵. 당연히 토니로부터 매일 뭐 먹었네, 오늘은 양말 빨았네 등등 아무 말 대잔치 편지를 받던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는 돈이 말하고 토니가 받아쓴 편지에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웃기는 이 영화. 센스가 넘친다)


그러나 공기처럼 떠도는 인종차별은 끈질기게 돈과 토니를 따라다닌다. 그들의 궤적을 따라도는 나도 그 공기에 질식할 지경이다. 아마도 내가 겪은 인종차별이, 내 친구들이 겪는 인종차별이 그림자처럼 그들의 뒤를 따르기 때문이겠지. 저 무고한 얼굴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영혼을 끊임없이 짓밟아대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에 나는 작은 욕지거리를 느낀다.


그 와중에 돈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돈은 밝히고 싶지 않던 사실을 토니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과하게 방어적이지만, 토니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가 지나서야 어제 일은 미안했다고 사과하는 돈과, "그냥 세상일이 복잡해."라고만 말하고 쿨하게 넘기는 토니. 어느샌가 인종차별주의자였던 토니는 그만의 넘치는 인간미로 돈을 대하고, 둘은 툭툭 거리면서도 서로를 아낀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남부의 시골길에서 그들의 차가 경찰에게 잡히고, 차 플레이트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를 잡은 경찰은 흑인이 보스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토니가 이탈리아 이민자라는 사실을 알자, "아, 그래서 네가 흑인 밑에서 일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60년대만 해도 이민자 중에서도 가장 늦게 온 편에 속하다 보니 이탈리아, 북유럽 이민자들은 차별을 많이 당했단다. (지금도 북유럽 쪽은 강한 악센트 때문에 그런 편. 뭐 그래도 한 세대만 지나면 외모에 차이가 없다 보니 나 같은 아시아인보다는 훨씬 덜 겪는다) 그 와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니그로 니그로 해대는 이 남부 사람들.  알고 봤더니 돈과 토니가 길을 잃고 들어온 작은 마을이 오직 "백인"만 살거나 통과할 수 있는 마을이란다. (다시 한번, 남부의 위엄)


"Dignity Always Prevails."


결국 참지 못한 토니가 (그 재수 없는) 경찰관을 주먹으로 날리고, 둘은 유치장에 갇힌다. 차 뒤에 탄 죄 밖에 없는데 돈도 같이 갇히고, 돈은 항의하지만 경찰들은 "흑인 주제에 태양 밑에 얼굴 들고 다닌 게 죄"라며 돈을 듣지도 않는다.

"존엄성(혹은 품위)이 항상 승리한다." 유치장에서 토니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돈. 이런 일은 자신에게 항상 있는 일인데 이것 하나 못 참으면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거라며, 토니에게 그 성깔 좀 참으라며 잔소리하는 중에 돈이 하는 말이다. 존엄성을 지키기 힘든 세상에서 돈이 지키는 존엄성은 아슬하고 위태한 줄다리기 같다.


사정해서 겨우 전화 한 통을 어디론가 거는 돈. 얼마 있지 않아 경찰서로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서장이 벌떡 일어나 "Sir, governor" 어쩌고 하며 전화를 받는 걸로 보아 돈이 아는 고위공직자인 것 같다. (아마도 케네디였던 듯. 토니가 흥분해서 말하는 부분을 놓쳐서 못 들었다. 아쉽) 전화 한 통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토니까지 풀려난다. (공무집행 방해라 사실 토니는 몇만 불 보석을 내야 간신히 풀려날 일인데, 그 와중에 '인맥'의 위엄이라니)     


세상을 바꾸려고 열 일하는 general secretary를 이렇게 써먹다니 (이러는 거 보니 진짜 케네디 형제 중 하나였던 듯) 하면서 유치장에서 나와 차 안에서 괴로워하는 돈. 토니는 이해를 못한다. "넌 세상을 진짜 몰라. 흑인이면서 흑인 음악도 안 듣고 맨날 성 안에서만 살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사니까, 진짜 땅에 발 붙이고 사는 느낌을 모르는 거야. 내가 너보다 더 흑인 같다 (I am blacker than you.) "며 타박하는 토니. 이 말에 돈은 차 문을 열고 빗 속에 나가버린다. 갑자기 왜 그러냐며 돈을 잡는 토니. 그리고 빗속에서 절규하듯 울부짖는 돈.  

"내가 성에서만 산다고? 내가 무대에서 멋들어지게 연주를 하면 내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겠지. 그렇지만 무대에서만 내려오면 나는 하루 종일 니그로야. 하루 종일 발에 밟히는 니그로라고!"


"If I am not black enough, If I am not white enough, If I am not man enough, What am I?"
"내가 완벽한 흑인이 아니고, 내가 완벽한 백인도 아니고, 내가 완벽한 남자도 아니면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한 표현인 듯), 나는 도대체 누구야?"



생각 없이 한 말에 이토록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분노가 터져 나오자 할 말을 잃은 토니. 집에 무언가를 고치러 온 흑인들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유리컵을 그대로 갖다 버리던 토니가, 돈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날 밤 토니는 돈이 묵는 "Colored Only" 호텔에 같이 묵는다. (그전까지는 돈만 흑인 전용 호텔에 내려주고 자기는 백인 전용 호텔에서 잤다)


"Because genius is not enough,
it takes courage to change people's heart."


나도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했었다. 왜 저렇게 위험한 남부 투어를 굳이 갔을까. 왜 돈은 보디가드까지 필요한 저 투어를 두 달에 걸쳐하기로 결정한 걸까. 공연을 시키면서 공연장의 화장실도 쓰지 못하게 하는 저 무식한 사람들에게 왜 자신의 공연을 보이기로 한 걸까.


마지막 공연 전 식사시간에 돈 셜리 트리오에서 첼로를 켜는 아저씨 (이름을 모르겠다)가 이유를 토니에게 말해준다. 6년 전 Nat king Cole이 돈에게 이 버밍턴 (도시 이름)에서 공연을 하도록 주선했는데, 돈이 이 도시에서, 백인이 지은 건물에서 처음 연주를 하는 니그로였단다. 돈이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한 무리의 백인 남자들이 무대를 난입해서 돈을 폭행했는데, 이유가 감히 백인 음악을 연주하기 때문이었단다. 그러면서 그 첼로 아저씨가 토니에게, "왜 돈이 이 투어를 하느냐고 물어봤었지? 왜냐하면, 그저 천재인 것은 충분하지 않아. 사람들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야."


이 사나운 적대자들의 숲 같은 거대한 남부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투어 일정을 이어가는 것은 돈만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가장 위엄 있고, 우아한 그만의 결투.


그 와중에 턱시도로 갈아입은 돈이 저녁식사를 하려고 다이닝룸에 들어섰는데, 그리고 그 룸에서 바로 공연을 해야 하는데, 흑인이기 때문에 식사는 할 수가 없다고 입구에서 저지당한다. 강하게 강의하는 돈과 토니 (돈은 그 와중에 우아하고 절제 있게, 토니는 밀어붙이며). 그 지배인의 말이 걸작이다. "I am not trying to insult him. It's just the way things have done here. (내가 돈을 모욕하려는 게 절대 아니고 그냥 여기서는 항상 그래 왔어.)" 항상 그래 왔기 때문에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백인. 순간순간을 모멸과 수치를 이겨내고 인간답기 위해 악을 써야 하는 흑인. 결국 공연을 하지 않고 박차고 나오는 돈. 홀에서 서빙을 하던 다른 흑인들이 통쾌하게 바라본다. 거부할 권리가 없는 그들의 삶에서 돈은 멋있는 영웅이다. 그 와중에 홀의 한쪽을 차지한 거대하고 화려한 Nativity Set(예수 탄생 순간을 담은 피겨세트)가 돈이 떠난 빈자리를 어색하게 울린다. 예수가 태어난 거룩한 순간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차별과 미움.  


결국 쫄쫄 굶은 둘은 흑인 전용 블루스 바에 들어간다. (탄성을 질렀다. 흑인들 틈에 선 돈!) 비싼 턱시도 차림의 둘은 영 어색하기만 하다. 그리고 곧 낡아빠진 피아노로 멋들어진 클래식을 연주한 돈은 곧 블루스 밴드와 재즈를 함께 즉흥연주를 한다. (대박, 대박, 대박!)


눈이 오는 길을 달리고 달려 뉴욕으로 돌아오는 돈과 토니. 토니는 성탄 가족파티에 시간 맞춰 도착하고, 집으로 돌아갔던 돈은 결국 다시 돌아와 토니의 가족파티에  참여한다. 돈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토니 편지 쓰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돌로레스. 그녀도 알고 있었던 거지. 남편이 그렇게 쓸 리가 없다는 걸.


출처 위키피디아


제목인 "그린북"은 짐 크로우 시대 (Jim Crow Era)에 흑인들이 여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호텔이나 식당 등을 알려주는 책자의 이름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토니가 여행하는 내내 뒤적이는 바로 그 책이다.


[짐 크로우는 합법적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던 노예제가 끝나고 20세기 중반까지 악명 높던 흑인 차별정책을 시작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그 시대를 아직도 짐 크로 시대라고 부른다. 흑인은 백인과 함께 공공기물을 이용할 수 없다. 버스에서도 함께 앉을 수 없고 개수대도 흑인 전용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인물들과 시대 흐름이 만나 흑인 인권운동이 60년 중후 반대 생겨났고, 그렇게 오늘날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인종차별, 성소수자 혐오, 계층 차별 등 다양한 차별의 현실을 두 남자의 우정과 일상을 통해, 살짝은 웃음기를 섞어 위트 있게 보여준 그린북.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만나서 갓 볶은 아주 좋은 원두로 내린 맛있는 커피를 마신 것 같다.


이 살기 힘든 현실을 인간애로 넘어서는 돈과 토니. 둘의 우정이 힘든 세상도 살 만하다고 말해준다.

연기에 한치의 실수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 비고 모텐슨과 마허샬라 알리. 와, 알리는 문라이트에 나왔다는데 나는 기억도 안 날 뿐이고...; 이런 류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감독과 각본의 힘이 매우 좋고, 이 좋은 각본을 이끌어가는 두 배우가 매우 매력적이다.  


당당히 인생 영화 중 하나에 이름을 올린 영화, 강력 추천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메리 포핀스 리턴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