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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Sep 20. 2019

1919

Eve Ewing의 책, 1919

시를 못 읽는다. 시어에 젬병이다. 시어를 알아보는 결이 없다.

몇 번 유명한 시집에 도전했지만 다 못 읽고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도대체 왜..... 시를 읽으면 시 해석을 같이 읽는다. 자연히 뭐 하는 건가 싶어서 시집에 손이 안간다.

몇 번 한 이후로 도전도 안 한다.



이브 어윙(Eve Ewing)의 1919가 정말 유일하게 내가 다 읽은 시집이다. 추천해준 사람도 "나는 시집을 읽을 만큼 팬시 하지 않는데 이건 다 읽었어"가 추천의 이유였다. 심지어 자기 책을 꾸역꾸역 찾아서 빌려주기까지 해서, 뭐 그럼 읽어보지, 그러고 책을 펼쳤는데, 



세상에 끝까지 다 읽었다. 그것도 마음 아파하면서.




어윙의 시집 1919는 독특한 장르의 결합물이다. 

1919년 시카고 여름에 실제 일어났던 폭동에 대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우연히 본 어윙이 다큐멘터리에 나온 사진과 코멘트에 대한 시를 쓴, 일종의 다큐 포에트리(Docu-poetry, 없는 단어를 방금 제작했음)이다. 미국 역사는 1도 모르기에 시집을 읽으며 여기저기 미국 역사도 서치 해가며 읽어야 했는데, 또 그런 만큼 가슴을 깊게 치는 것들이 있었다. 


노예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0년대 초기의 미국은 아직도 노예제의 적대적인 냄새가 공기 중에 짙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미국 남부의 목화밭에서 일을 하던 흑인들은 진저리 나는 고통스러운 남부의 삶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당시 가파르게 성장하던 신도시인 시카고를 주목했고, 진보적인 북부에 대한 꿈을 안고 시카고로 너도 나도 모여들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흑인 인구의 증가는 흑인들이 밀집하기 시작한 지역에 먼저 거주하던 백인들의 반발감을 불러일으켰고, 자연스럽게 백인과 흑인이 사는 지역은 '분리'되기 시작했다. 공개적으로도 아직 흑인 백인간 분리가 있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두 인종 간에 긴장감과 적대감이 더욱 빠르게 팽창했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저기서 젊은 백인 남자들이 흑인들을 린칭 하기 시작했고 끊이지 않는 구타와 살해가 일상이 되어가던 어느 날, 시카고 남부의 한 해변가에서 수영을 하던 흑인 남자아이가 실수로 백인 구역에 넘어갔다가 백인 아이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맞고 죽는 일이 일어난다. 이를 목격한 흑인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던(그 장면을 목격한) 경찰에게 신고하지만, 경찰은 (당연 백인) 가해자들을 체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해서 1919년 여름 여드레 동안의 폭동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1919에 담긴 사진들은 참혹하다.

알지 못하는 상대를 '흑인이기 때문에' 백주대낮에 맨손으로 살해한다.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정작 사냥당하는 것은 흑인이다. 공권력이 그들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당시 일리노이 주지사마저 백인 갱에게 비밀리에 돈을 대어 흑인들을 향한 혐오범죄를(혐오범죄라는 표현이 생긴 것도 10년이 채 안되었다고 들었다) 도왔다고 한다.      


린칭(Lynching)당해 쓰러져 있는 흑인과 그를 둘러싼 백인 경찰들(가해자들인 걸까)



퇴근하던 흑인을 잡으러 달러 가는 한 떼의 백인 무리(심지어 백 년 후 우리 동네다)



어윙은 이렇게 다큐멘터리의 사진과 역사적 기술을 짧게 짧게 기술하면서 그에 대한 시를 썼다.


시를 읽는 나도 자연스럽게 비탄과 깊은 분노에 빠지게 된다. 가장 충격적인 시는, "얼어 죽는 게 낫다"이다. 왜 얼어 죽는 게 더 낫지? 하며 시를 읽었더니, 첫 구절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얼어 죽는 게 더 낫다.

맞아 죽는 것보다.



적어도 얼어 죽으면 얼음 속의 꽃처럼

존엄하게 죽을 수는 있잖아.


....




얼어 죽는 것과 맞아 죽는 것 사이에서 삶과 죽음을 결정해야 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


먹먹해지는 마음으로 시를 읽어 내렸다.








어윙은 시카고대학에서 교육사회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고, 에세이스트이고, 시인이다. 2년 전부터는 마블 코믹스에도 연재 중이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흑인 여자아이가 스파이더맨의 사이드킥으로 활약하는 내용인 걸로 안다. 1919를 읽는 날 보고 마블 광팬인 직장동료가 열변을 토하며 알려줬다.) 

'이 모든 걸 어떻게 다 할 수 있을까. 대단하다.' 그 와중에 깨알같이 감탄.




이브 어윙




'타인'에 대한 공포는 역사를 초월한, 생각보다 대중적인 주제이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을 선동하고 자극하기 위해 쓰는 촉매제이고, 히틀러가 1차 세계 대전 이후 패전 독일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유태인과 동성애자, 집시들을 박해할 때 사용했던 키워드이다. 

'나와 다른 타인',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이 주는 막연한 공포감은 언제나 인류에게 무차별적 살상이라는 어찌 보면 가장 천박하건만, 가장 유창하게 잘 사용한 날카로운 무기를 선사했다. 



사회를 지배하는 자에 의해 "타인"으로 규정되어 심지어 박해를 받는다는 것-

그 속에서도 시를 쓰고, 끊임없이 자신을 찾기를 노력하는 어린 흑인 여자아이의 꿈을 그리고, 에세이를 쓰고,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것-

아, 얼마나 매력적인가.


아니,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그저 매력적이라는 단순한 표현으로만 간단히 말해서는 안된다.

내가 보는 오늘의 미국은 여전히 흑인들이 살 수 없는 공간이다. 수많은 불법체류자들이 살 수 없는 공간이고, '타인'이 숨 쉴 수 없는 공간이다.



'나'를 진공 박제해서 살 수 없게 하려는 환경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처럼 피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내가 이브 어윙의 시집을 통해 읽은 아름다움이다.

공포스러운 과거를 끝끝내 여미어 안고 활짝 피어나겠다는 의지.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award-winning이라는 단어가 찾아낸 의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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