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잠든 듯 조용하고
내게 글쓰기는 종종 감정을 배설하는 창구가 된다. 감정의 배설로는 좋은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감정을 뿜어내듯 써야 할 때만 글을 쓸 수 있다. 그 외에는 그다지 글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잘 들지도 않는다. 무엇이든 경전을 읽듯 글로 남겨야만 직성이 풀리던 나는 어디를 간 걸까... 생각하다가도 그냥, '나이 들어서 닳아 없어졌나 보지'하며 쉬운 결론과 함께 넘어가버린다. 뻔하게 닳아 없어진 어딘가의 '나'는 닳고 닳은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강렬한 감정에 자극받을 때에만 글이 써지는 사람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이 든다'는 말의 의미는 경험이 쌓여 노련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 노련함은 어느 한편의 '닳아 없어짐'이라는 의미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냥 자조적으로 생각해본다. 모든 것을 낯설어하는 새로움의 닳아 없어짐, 모든 것을 경이롭게 이해하는 마음의 닳아 없어짐 같은 것들.
내 표현에 따라 나는 어느 정도 닳고 닳은 사람이다. 심지어 몇몇 부분은 반짝반짝하게 윤이 날 정도로 뺀 질 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내 감정을 대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 겪어본 감정들은 나는 이제 꽤나 마스터했다.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은 적당히 피하는 법을 안다. 즐기고 싶은 감정도 과하지 않게 즐기는 법을 배웠다. 불편하고 미운 사람이 있어도 그 감정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도록 적당히 뒤로 물러나서 그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법을 (대강은) 알고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지 않도록 나는 끊임없이 감정을 재고, 깊이를 체크하고, 내가 얼마나 돌아올 수 있는지를 가늠한다. 마치 피아노를 조율하듯 느슨해진 건반은 적당히 긴장을 더하고 빡빡한 건반에는 윤활제를 조금 더 더하듯, 나는 감정을 꽤나 잘 조율한다. 나이 먹음과 함께 얹은 '닳고 닳음'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가끔, 기절할 듯이 피곤한 하루의 끝에 찾아오는 밤에도 마치 가위로 깨끗하게 도려낸 듯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있다. 오늘 같은 밤. 베개에 머리를 댐과 동시에 침대에 빨려 들 듯 잠이 드는 (복 받은) 나에게는 좀처럼 잘 오지 않는 밤이지만, 가끔 이렇게 기척 없이 찾아오기도 하는 밤이다. 금요일 밤인데 오늘은 이 도시의 밤을 가득 채우는 그 흔한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돌아가는 히터 소리와 내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전부다. 그리고 나는 마치 대낮을 살듯 명료하게 깨어있다.
그리고 이런 밤이 닳고 닳은 내가 슬며시 뺀질한 외피 껍질을 벗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이 참 오랜만에 격렬한 감정과, 혹은 기억과 만나는 시간이다.
두려운, 어린, 확신이 없는 내가 외피 바깥으로 나와 오랜만에 얕은 숨을 차갑게 쉬어보는 시간이다.
이런 나를 누가 진정 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래도 한 사람이 떠오르기는 하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그 사람이 곁에 없어서 나는 가끔 이렇게 발작하듯 글을 쓰러 이 곳에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밤시간은 참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