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이야기"
로튼토마토 신선도 98%에 빛나는, 넷플릭스에서 만든 프로그램 중 가장 빛나는 작품이라 생각하는, 언빌리버블. (한국명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인생이 충분히 무겁다고 생각하다 보니 쉬기 위해 보는 영화는 가능한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쉬운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편인데, Unbelievable은 그런 나의 영화(드라마) 충족 기준에서는 한참을 벗어났다. 성폭행 실화에 바탕한 영화라니...! 그러나 에린 브로코비치를 각색한 작가가 다시 실화를 각색한 여성주의 작품이라는 이야기에 혹 해서 첫 화를 시작했는데, 이틀 만에 밤낮으로 달려 총 여덟 편의 드라마를 끝냈다. 도저히 놓칠 수 없는 이야기를 완급 조절에 실패하지 않고 끝까지 적당한 호흡감으로 달려가는 감독의 역량에 찬사를 보낸다.
실화를 각색한, 실화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을 이루어내는 여성들의 이야기, 여성이 여성을 살리는 이야기이다.
한겨레에 좋은 칼럼이 있어 함께 소개해본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7662.html
첫 화가 가장 불편하고 힘이 든다. 마치 종이에 연필로 무언가를 써내려갈 때 사각사각 소리가 나듯 마리가 성폭행을 당하고, 경찰로부터 마치 취조와도 같은 인터뷰를 당하고,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마리가 외톨이가 되어가기 시작하는 과정이 아주 조용한 마찰음을 내며 그려진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이 종이의 사각거리는 소리만큼 작지 않았을텐데, 마치 마리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세상이 그녀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옥죄는 과정이 타인의 시선만큼 건조하게 그려진다. 1편만 견디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나아진다고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미리 격려를. :)
18살 마리는 3살 이후로 계속 위탁 가정에서 자란다. 그것도 한 집이 아니라 여러 집을 전전해야 했다. 성폭행을 하려던 위탁 가정의 양부를 밀쳤다는 이유로 우악하고 거대한 손으로 뺨을 열 번이나 맞아야 했던 어린 마리. 양부가 파렴치한 나쁜 놈이었지만 집을 잃고 다른 위탁 가정으로 옮겨야 하는 건 정작 어린 마리였다.
작년에 근처 대학에 커뮤니티 봉사를 하러 갔었는데 그 대학 출신 사회복지사가 자신이 하는 프로그램을 학생들에게 알리러 나왔다. 그 사회복지사가 하는 프로그램은 "위탁 가정 아이들에게 가방을"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었다. 위탁 가정마다 상황이 다르다 보니 원하는(키울 수 있는) 아이가 다르게 마련이다. 어린아이만 받는다거나, 아이와 위탁 부모가 잘 맞지 않는다거나 하는 상황들이 그러하다. 그렇다 보니 종종 위탁 가정에 위탁된 아이들은 집을 옮겨야 하는데 그때 아이들이 짐을 쌀 수 있도록 주어지는 짐가방이 검은색 비닐봉지라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에게 버림받아 위탁 가정에 살고 있는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알지 못하는 가정으로 다시 가야 할 때, 자신의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이 쓰레기봉투로 쓰이는 검은색 비닐봉지라면, 그 가방에 꾸역꾸역 얼마 안 되는 짐을 담아야 하는 아이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 작은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그 사회복지사는 위탁 가정에 맡겨지는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작은 캐리어를 모으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마리도 그런 검정 쓰레기봉투에 수도 없이 짐을 담고 집을 옮겨 다녔어야 했을 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십 겹의 보호막을 자신에게 덧씌웠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당한 성폭행을 진술할 때도 그녀는 철저히 자신이 당한 일과, 자신의 감정과는 유리되어 마치 타인에게 일어난 일을 묘사하듯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리고 그녀의 진술은 거짓말로 매도당하고, 그녀가 겪은 성폭행은 오히려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되어 공권력 모독죄로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어렵게 사귄 친구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며, 살던 집에서도 도망치듯 나와야 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마리는 자신만의 고치 속으로 더욱 파고들어, 왜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삶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영위해간다. 어떻게 살아냈을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전혀 다른 주인 콜로라도에서 비슷한 강간 사건이 발생하고, 여형사 둘이 힘을 합쳐 그 연쇄 강간범을 검거한다. 그리고 그 강간범의 사진기에서 마리를 발견하고, 그제야 마리는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 두 여형사가 아니었더라면, 마리는 평생 어둠 속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살아갔을 것이다. 마리는 시를 상대로 고소하고, 백만 달러는 벌 수 있을 거라는 변호사의 말에도, 나는 그저 이 상황을 끝내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한화로 1억 5천 정도밖에 되지 않는 합의금을 받고 조용히 떠난다. 아주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던 그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바닷가까지 달려간다. 거기서 두 형사 중 하나인 캐런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라고 인사를 전하는 그녀.
합의금으로 차도 사고, 전화기도 바꾸고 옅지만 화장도 했다. 누군가가 믿어주는 세상에서 사는 그녀는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콜로라도의 두 여형사 캐런 듀발과 그레이시 라스무센도 눈여겨봐야 한다.
캐런은 전형적인 굿걸, 교회를 다니고, 같은 직업을 가진 남편이 있는 매사에 진지한 사람이고, 그레이시는 집업 트럭을 끌고 다니는, 카우걸 같은 옷차림의 터프한 사람이다. 그레이시는 그렇지 않은 듯하면서도 캐런을 '멘토링'한다. 마지막 연쇄 강간범을 잡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은 빠지고 캐런만 보내어 모든 공을 캐런이 가지게 만든다. "너 일부러 그랬지. 쟤 키워주느라고...?"라고 다른 형사 친구가 묻자 그저 웃기만 하는 그레이시.
여성이 여성을 멘토링 하고, 여성이 여성을 키워주는, 여성이 여성을 믿는. 이 아름다운 드라마.
마리를 조사했던 남자 경찰관들과 달리 캐런과 그레이시는 성폭행 피해자들을 만날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다. 그녀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들어주고, 모든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며, 피해자들이 원하지 않을 때에는 뒤로 물러서 주거나, 필요할 때는 도움을 준다. 모두 다르게 반응하는 피해자들을 "전형적이지 않다"며 재단하지 않고, 그들이 겪는 과정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쓰다 보니 다시 감동이 밀려오는 이 드라마. 넷플릭스 드라마 중 가장 최고라고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