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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May 27. 2020

네뷸라, 아지랑이

<라틴어 수업>, 한동일

네뷸라, 이 익숙한 이름이 반갑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나름 비련의 조연인 것 같은 그녀. 참고로 말하자면 마블의 유니버스는 1도 모르는, 그냥 가끔 생각 없이 볼 영화들을 영화관에서 볼 때 마블의 히어로물이 간혹 섞여 있다 보니 네뷸라와 안면이 있는(?) 정도의 반가움이다.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전혀 모르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인피니티 워 같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화 몇 개를 본 것으로부터 끼워 맞춰서 알아보자면 네뷸라는 언니 가모라에 대한 심각한 애증을 소유하고 있고, "삐딱하지만 내면은 따뜻하고 여린" 사람이다. (사실 몸이 개조되어 거의 전신이 로봇인 탓에 '사람'이라고 쓰기 망설여졌다. 그러나 따뜻한 성정이 있는 사람을 사람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겠나)

주인공인 가모라 보다도 왜인지 마음이 더 가는, 삐딱한데도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정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그런 존재 말이다. 독기 서린 말을 내쏟고 못난 짓만 골라서 하는 데도, 언뜻 보이는 서러운 눈빛에 저 마음에는 대체 뭐가 담겼길래 저렇게 슬플까, 싶어서 맘껏 미워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네뷸라, Nebula



난데없이 한동일 변호사/신부님의 <라틴어 수업> 앞부분에서 '네뷸라'를 다시 만났다. 라틴어로 네뷸라는 아지랑이라고 한다. 신부님의 책은 아지랑이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네뷸라'라는 단어와 그 의미를 읽자마자 나는 가모라의 동생 네뷸라를 떠올렸다. 아, 아지랑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그것. 잡을 수도,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는 그것. 참 덧없는 이름이다. 결국 네뷸라는 아지랑이 같은 존재였구나.


어쨌든-


2017년에 나온 <라틴어 수업>을 아마도 2018년 책이 한 55쇄쯤을 복사할 만큼 판매되었을 때 사서, 2020년 5월에 읽었다. 2년여 전에 산 책을 이제야 느지막이 책장에서 꺼내며, '이제라도 읽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첫 장을 여는데 깜짝이야. 한동일 신부님의 친필 싸인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라딘을 통해 해외배송으로 받은 책인데, 심지어 55쇄 판에 찍힌 책 중 하나인데, 그 많은 책들에 직접 짧은 편지글을 남기고 계신 것이었을까? 





책이 55쇄를 넘길 만큼 베스트셀러인 줄 알지 못하고 구입했다. 알라딘에 접속할 때마다 첫 페이지에 왕왕 떠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라틴어 같이 죽은 사어를 누가 좋아하겠나 싶었다. 인기 없는 책일 줄만 알았다. 내가 책을 구입한 이유는 한 신부님이 책에서도 여러 번 말씀하시듯 현대의 많은 언어들의 뿌리가 되는 언어인 라틴어에 대한 책이라길래 어떤 배경지식도 없이 그저 흥미가 당겨 구입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저 고어에 대한 동경이나 지식만이 담긴 책이 아니었다. 삶이 담긴 책이어서 그렇게 인기가 많았나 보다. 글 한 줄, 한 줄에서 한 신부님이 직접 쓰신 편지글을 읽는 듯이 그분의 생각이 전해진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하지는 않지만 신부로서의 사목 생활과, 학생으로서 바티칸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많은 층 사이에 깃들여진 고민이 마지 아지랑이처럼 눈에 밟힌다. 생각이 많은 분인 것 같았고, 여린 사람인 것 같았다. 책 어디에선가 살짝 흘리시는 말씀처럼 소심하고 내향적인 분인 것 같았다. 삶의 길목 길목마다 치열한 고민을 하며 선택을 하는 삶을 살아온 분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과 치열한 절망 사이에서 찾아낸 작은 답들을 그러모아 라틴어를 가르치는 수업에서 젊은이들에게 희망으로 나누어 준 분인 듯했다. 




아.


라틴어에 빗대어 삶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신부님의 글을 읽고 있으니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이 있다.

이런 토막토막 삶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가 얼마나 고픈 세대였으면 그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을까.

얼마나 굽이굽이 힘들게 느껴지면 책 말미에 담긴 학생들의 추천의 글에서 신부님을 통해 희망을 찾은 이들이, 위로를 얻은 이들이 이렇게 많은 것일까.



아, 아지랑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그것. 
잡을 수도, 그렇다고 잊을 수도 없는 그것. 



한 신부님의 책에서 아지랑이 이야기는 꽤 앞부분에 나온다. 아마도 첫 수업- 한국에서 첫 학기는 봄학기이니까, 봄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3월의 어느 오후에 들을 교양 수업의 첫 시간에 신부님이 나누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가는 시간, 숙제로 신부님이 강당을 가득 채운 학생들에게 해주는 이야기.


'아지랑이' 자신만의 네뷸라를 찾아보세요. "마음속에 일어나는 아지랑이"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마음속에 일어나는 아지랑이를 살펴보라니, 내 마음속의 아지랑이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여태 있었나. (생각해보니 한 분 있었다. 강남순 선생님. 대학원 시절 한국에서 만난, 지금은 베테랑 석학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주니어 학자였던 강남순 박사님은 학생들에게 '꿈을 꾸라. 실패할 줄 알면서도 꾸기에 그것이 꿈이지 않는가'라고 항상 말씀하셨었다. 희망하라. 절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꿈꾸는 희망만큼 희망찬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해도 자꾸만 땅에서 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잡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사라지지도 않는 아지랑이 같이 자꾸만 일어나는 마음의 아지랑이에게 관심을 가져보라니.

마음이 살캉, 하는 소리를 내며 살짝 좌우로 흔들렸다. 


아지랑이처럼 헛된 것은 많지도 않다. 실체도 없고, 잡히지도 않고, 쉽게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것의 대명사이다. 곧 사라질 헛된 것이니 눈에 보여도 없는 듯 취급하며, 그저 무시하는 존재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을 살펴보라니. 자세히 들여다보라니. 더군다나 내 마음의 아지랑이를 보라니.


그제야 내 마음에 일렁일렁 일어나는 아지랑이가 선연히 보인다. 그토록 무시하고 애써 그 자리에 일렁이며 피어오르고 있지 않은 듯 취급했던 아지랑이가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듯 확대되어 거대하게 보인다. 애써 싹이 났다고 느낄 때마다 싹을 자르고 잘라 없는 듯했던 그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것을 마치 한 신부님이 보신 것만 같았다.



아마 이래서 수업을 들은 많은 이들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위로를 받았겠구나.


백 명의 마에스트로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신부님. 그가 말하는 마에스트로는 말 그대로 한 분야의 거장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마에스트로는 어떤 분야의 대가가 아니라, '자기 삶의 거장'이 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남과 다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 더욱 당연한 우리의 삶, 갈매기도, 기러기도, 참새도, 모두 다른 방법으로 날지만 모두가 날고 있음은 틀림없는 것처럼, 다른 이들과 다른 방법으로, 속도로 가고 있더라도, 그저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대가"가 되어야 한다.



이십 대 뿐만 아니라 사십이 되어서도, 

삶의 길목마다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지금의 이 지점에서 내가 알아야 할 이야기였던 것 같다.



조용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듬고,

하루를 하나씩 모아서,

이 삶의 마에스트로가 되기를.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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