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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May 31. 2020

놓친 기회, 그리고 시간에 관한 溯考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넷플릭스에 있길래 짬이 날 때 보고 있다. 85세의 나이로 태어나 남들과 다르게 어려지는 벤자민이 데이지와 사랑에 빠져 둘이 함께 지내는 부분을 보고있다. 예전에 봤던 영화인데, 예전에 본 영화를 다시 이렇게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릴적 벤자민은 누가봐도 호호 할아버지라 남들 보기엔 그저 할아버지가 어린 여자아이와 놀아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 데이지와 벤자민은 같은 또래이다. 엄마 퀴니를 제외하고 누구보다도 벤자민을 아끼고 이해하는 데이지. 이후 한참을 헤어져 있다 40대 중반에 서로의 나이가 비슷해지는 즈음 삶은 둘을 다시 연결하고, 그렇게 둘은 사랑에 빠지고, 몇해 간 서로를 마음껏 사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간은 지나고 나날이 주름이 늘어가는 데이지와, 나날이 젊어지는 벤자민. 


이 영화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가 만들어지던 날 밤 태어난 벤자민.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마다 시간과 기회, 우연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벤자민과 데이지가 함께 보내는 첫 밤도 닫힌 문 바깥의 시계가 재깍재깍 소리를 내며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유명한 댄서였던 데이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날도 영화는 벤자민의 나레이션으로 길게 왜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겹쳐 데이지가 다쳤는지를 여러 테이크를 할애하며 보여준다. 리허설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건물 밖으로 나오던 중 달려오던 택시와 부딪쳐서 다리에 다섯 군데의 골절을 입고 발레리나로서의 삶을 접어야 했던 데이지. '만약 택시 기사가 잠깐 멈추어 커피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데이지가 중간에 잠깐 멈추어 친구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택시에 탄 손님이 조금만 더 빨리 나왔더라면', 데이지는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만약 택시 기사가 잠깐 멈추어 커피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데이지가 중간에 잠깐 멈추어 친구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택시에 탄 손님이 조금만 더 빨리 나왔더라면', 데이지는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택시기사는 커피를 마셨고, 데이지는 신발 끈이 끊어진 친구를 기다렸으며, 손님은 상점에서 포장이 늦어져 늦게 나왔다. 데이지는 오는 택시를 보지 못했고, 그때 하필이면 택시기사는 잠깐 한눈을 팔았다. 그리고 데이지는 택시에 부딪혀 다리에 복합골절상을 입고,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게 된다.


데이지의 사고를 설명하는 벤자민은,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일어났고, 삶은 결국 일어난 일의 모습 그대로이다" (뭔가 이런 비슷한 뉘앙스로. 영어로 봐서 정확한 표현의 번역이 안된다) 라며 나래이션을 끝맺는다. 


삶은 결국 일어난 일의 집합체이다.



43세의 데이지와 49세의 벤자민은 누가 보기에도 선남선녀이다. (헉소리 나게 예쁜 케이트 블란쳇과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생긴 미남은 일찍이 없었다는 브래드 피트의 전성기이니까요)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만 "우린 때가 되었을 때 만난 게 맞아."라는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서로를 오래전부터 사랑했지만 스물 세살의 어린 데이지에게 나타난 벤자민은 초로의 아저씨였고, 누가 봐도 벤자민은 그녀의 친구가 아닌 그녀 할머니의 친구로 보였다. 그런 그들이 30대 후반, 40대에 다시 만났을 때엔 누가 봐도 의심할 것 없이 아름다운 커플이다.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 벤자민은 나날이 주름이 옅어져가고, 그의 근육은 날로 생기를 더한다. 하루가 다르게 눈 가에 주름이 생기고 피부의 탄력을 잃는 데이지는 젊어져가는, 더욱이 아름다워져 가는 벤자민 곁에서 나이듦을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언젠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될 자신이 짐이 될 것을 걱정해 벤자민은 데이지에게 이별을 고한다.


삶은 그렇게 계속 모양을 변형한다.


그러나 사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데이지는 계속 어려져서 기억조차 잃은 벤자민을 몇 년 후 다시 찾아낸다. 치매로 기억을 잃은 벤자민은 다시 만난 데이지를 보며 "할머니,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라고 묻고, 그녀는 그런 그를 다시 데려와 끝까지 돌본다.  결국 아기로 삶을 마감하는 벤자민, 끝까지 그를 지킨 데이지.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생각은 과거에 대한 후회이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다보니 가끔 공상에 빠질 때(꽤 자주 공상에 빠지는 타입이다) "만약...."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하는 질문을 자주 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이가 들다보니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나 아쉬움이 남는 지점들이 생기기 때문인 듯하다. 

후회가 남는 지점들에 대한 공상들은 마치 벤자민이 데이지의 사고를 설명하듯, '만약'으로 진행된다. ''만약 내가 미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공부를 했더라면,' '만약 내가....'


그러나 벤자민이 이야기하듯, 결국 삶은 이루어진 일들의 집합체일 뿐, 일어나지 않은 '만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후회 뿐이다. 일어나지 않은, 혹은 일어난 일은 결국 그것이 내 삶이고, 나는 그 삶을 살아갈 의무를 지닌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 그 때 일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은 진짜로, 아무 소용없는, 허무한 행위일 뿐이다.




나는 성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유능한 정치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신랄한 학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아주 착한 딸이 되고 싶었다.

나는 멋드러진 연주를 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세계적인 기타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유명한 설교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이 많은 꿈, 어쩌면 하나도 이루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루지 못한 꿈들도 많다. (예를 들면, 착한 딸이나 세계적인 기타 연주자는 특히나 애진작에 글러먹었다.)


여태까지 놓친 많은 기회들과, 앞으로도 놓칠 많은 기회들.

그러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흘러가며, 나는 내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있다.


그리고 나는 '괜찮다.'


삶은 무엇을 이루어야 의미있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항상 갈망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채 알지도 못한 채 갈망했다. 그러나 삶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원하는 것들을 많이 얻지 못하는 것이 더욱 삶의 진짜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얻지 못한 기회에 대해 한스러워했다.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나의 어리석은 욕심, 건강하지 못해서 잔병치레를 하는 나, 박사과정을 망친 그 나쁜 지도교수에 대한 원망, 이런 것 따위로 어느 순간 눈을 떠 나를 돌아보니 한탄으로 내 영혼을 좀먹이고 있는 내가 보였다. 향기롭지 못한 어른으로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가운 물 한바가지를 머리에 쏟아부은듯 서늘해졌다. 


벤자민이 이야기하듯,

삶은 일어났어야 할 일로 이루어진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결국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일 뿐이다.




"삶은 무엇인가를 성취해야 의미있다"는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은 '살아있기 때문에 의미있다". 관계는 '만났기 때문에', 노래는 '불렀기 때문에' 의미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의미있기를 결정한다면,

지금 현재가 그토록 향기로운 줄, 이제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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