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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un 30. 2021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길을 잃다

하이킹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이킹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장비를 갖추고 ‘하이킹’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이킹을 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콜로라도 파고사 스프링스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지만 최근 새롭게 휴가지로 개발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스키와 야외 온천, 여름에는 래프팅, 튜빙, 승마, 온갖 종류의 야외활동이 가능하다. 미국 내에서도 콜로라도는 유난히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웬만한 할리우드 스타는 콜로라도 아스펜에서 항상 겨울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하여튼 가장 쉬운 트래일을 골라서 친구와 함께 나섰다. 얼마 전에 허리를 다친 나는 허리에 정성껏 브레이스를 두르고,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 강아지와 어린아이들도 오르는 트래킹 트레일에 스틱 두 개를 들고 나섰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비포장도로를 다시 더 달려서 트레일 입구에 도착했다. 흰색과 검은 얼룩이 예쁜, 수줍은 강아지가 엄마랑 하이킹에 나섰다가 가볍게 인사를 한다.(강아지들도 인사를 한답니다. 가벼운 눈인사랄까)


약간의 경사를 지나면 약간의 평지가 나타났다. 해발 8,000미터를 걸으며, 쌕쌕 숨을 쉬며, 구비구비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아름다운 전경에 넋을 잃으며, 그렇게 쉽고도 짧은(나에게는 꽤나 어려운) 여정을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걸어서 물속의 미네랄로 인해 우윳빛을 띄는 물로 유명한 오팔 호수에 도착했다. 산맥 한 가운에 분지처럼 푹 들어간 곳에 자리한 호수는 아주 조용했고, 크고 작은 들꽃으로 가득했다. 소나무의 향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진했으며, 군락을 이룬 백양나무는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했다. 이곳이 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간중간 만나는 모든 자연이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아우러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몇 해 전 소설 shack을 영화로 만든 Shack에 보면 주인공이 사고로 먼저 죽은 어린 딸을 환상처럼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이런 곳이었다. 아버지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아이는 행복하게 뛰어놀고 있는데, 바로 해가 따뜻하게 둘러싸는, 꽃이 만발한 산속의 평지였다.


어쨌든, 우리는 그곳에 잠깐 앉아서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고, 다시 일어나 트레일로 돌아오려는데, 왜인지 호수 반대로 돌아가도 트레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계속 호수를 따라 걸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실수였으니...

그대로 길을 잃고 말았다. 순식간에 작은 오솔길은 끊겼고, 사람들이 밟아 딛기 쉬운 땅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작은 오솔길인가 싶어 따라가 보면 무성하게 자란 가시 돋친 나무들이 다리에 생채기를 내며 그곳이 길이 아니라고 차갑게 말했다. 마치 네 영역이 아닌 곳에 들어와 있다고 경고하는 듯이 느껴졌다. 여태 걸어온 길로 다시 되돌아가면 되니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웬일. 뒤를 돌았는데 걸어온 길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사람이 닿지 않는, 핸드폰의 시그널도 없는, ‘내 세상’의 경계 바깥의 영역에 들어섰다. 쉽게 당황하고 겁먹는 나는 곧장 겁을 먹었고,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걸 알 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하이킹은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내 친구가 이성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아직 호수의 물소리가 왼쪽에서 가깝게 들리니 우리는 그렇게 길을 멀리 잃은 것은 아니라면서 여기저기 알아보는데, 이미 수분 부족과 함께 당도 떨어진 나는 겁을 있는 대로 먹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길이 있음’과 ‘길이 없음’의 차이가 이토록 큼에 놀랐다. 그리고 내 삶은 항상,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랐다. 누군가 먼저 나보다 앞서 간 이들이 밟아 놓은 길을 밟으며, 훨씬 편하게, 길 가에 난 꽃과 나무들을 사랑하고 감탄하며, 그렇게 걸었다.

길이 나지 않은 길은 가시밭길이라는 표현은 누군가 실제로 가시밭을 가봤기에 나온 말이지 않을까. 한 번도 밟히지 않는 가시나무들이 온몸으로 저항하는 길을 누군가 먼저 우리를 위해 밟아준 것이다. ‘개척자’들은 진짜 용감한 이들이다. 길이 없는 곳에 어떻게 길을 낼 생각을 했을까. 여자로서 최초로 대학에 진학한 이들, 여자로서 최초로 전문 직업을 가지고 마땅히 자신의 자리가 이곳이라고 용감하게 개척한 그녀들. 한국인으로서 처음 미국에 발을 디디고, 인종차별의 거친 가시밭을 한국인으로서 땅을 다진 이들. 그들 덕에 나는 고등교육을 받고, 미국에 와서, 전문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길을 잃은 와중에 그들에게 감사를 했고, 그들의 노력과 삶에 감사를 드렸다.


생각에 빠진 사이 친구가 다행히! 우리가 온 오솔길을 기적같이 발견해서 한 시간여 만에 우리는 다시 트레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걷기가 훨씬 수월했고, ‘길’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갈길을 안다’는 것이 이토록 축복인 것을, 길을 잃기 전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갔던 길을 되돌아 트레일 입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하나 깨달은 것은 우리는 모두 우리 각자의 삶의 ‘개척자’이다. 아무도 우리 삶을 미리 산 적이 없고, 매 순간의 결정은 우리 삶의 다음 디딜 곳을 결정하는 ‘개척’의 순간이다. 소름 끼치고, 결연하기도 한 매 순간의 결정 들일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내 삶의 다음 스텝 때문에 기도하고 있던 나는, 결국 내 삶의 다음 디딜 곳을 결정하는 것은 내 몫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그러나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여태 보아온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기억하면, 길을 잃더라도, 호수의 물소리가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다시 찾게 한 것처럼, 나를 삶에 매여두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내가 길을 잃더라도 나는 삶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길’이 있음을 감사하며.






아스펜나무. 빨간머리 앤의 그 백양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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