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을살았으나, 여전히 죽이고 싶은.
영어로 한 편의 글을 쪄내고, 그 글을 강단에 서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차라리 학교에서 가르치면 조금 낫다고도 한다. 학교는 '다양성, 다름'에 훨씬 열려있는 사고와 자세를 지녔기에, 강한 액센트를 가진 외국인이라도 그의 사고와 컨텐츠가 좋으면 그는 좋은 교수, 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미국에서도 외국인을 만날 일이 많이 없는 이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들의 세계에 난데없이 와서 박힌 토큰이다.
어린아이와 성인에게 사용하는 대화가 다르듯이, 대화에서 사용되는 영어가 다르고, 청중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영어가 다르다. 이 미묘한 차이, 섬세한 단어의 어감과 색감을 알아차리고 듣는 이와 말하는 내 의도의 색조에 맞는 단어와 표현을 골라 사용하는 일은 매우 아름답지만, 고단하고, 또 언제나 완벽할 수 없는, 이미 실패하고 시작하는 글쓰기와도 같은 기분이다. 한국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막막함을 항상 무거운 돌덩이처럼 가슴에 멘 채 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국어와는 다른 질감, 영어사전에서는 내가 원한 그 표현이라고 분명 말하는데 원어민에게 물으면 갸우뚱하게 하는 표현들. 언어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단어, 표현, 용례가 가지는 아주 섬세한 베일과도 같은 의미의 무수한 차원들이 깔깔하게 자신의 차이점을 드러낸다. 느리지만 하나하나 알아간다. 그러나 영어를 죽이고 싶은 마음, 이 끝없는 열패감은 동시에 숙명처럼, 혹은 이미 자아의 한 부분처럼 내 마음 어딘가에 그루터기를 단단히 그러잡고 천착해있다.
이 영어에 대한 열패감은 아마도 내가 나머지 삶을 살기로 결정한 이 낯선 땅에 조금이라도 더욱 동화되고자 하는, 혹은 조금이라도 덜 '낯선 자'로 살고 싶은, 돌출되고 싶지 않은, 소속감에 대한 욕망이겠고,
또한, 지난 십 년 동안 망각의 구름이 하나씩 내게로부터 앗아간 내 모국어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그 자유-를 영어를 통해서 느껴보고 싶다는, 자유함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겠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편하지만,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은 점차 어려워진다. 예전이라면 쉬웠을 표현이 더 이상 쉽게 내게 가까이 오지 않고 아주 힘겹게 바윗돌을 들여오려야 그 아래 보이는 가재처럼, 몸울 웅크리고 내게 틈을 보여주질 않는다. 혀와 이 사이에 단어가 마치 갈 곳을 잃고 멍하니 서있는 치매 노인처럼 망연히 맴돈다. 한 단어 뱉기가, 한 단어 쓰기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모국어는 잊어가고, 새 언어는 가까이 오질 않는다. 영어의 재미를 알지 못하는 탓일까. 영어로 읽는 글이 주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매료되지만, 그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꿈도 꿀 수가 없다.
중2 영어로 글을 써서 그 글로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해야 하는 나로서는, 유려한 표현을 사용하는 원어민들의 영어가 그저 부러울 수밖에 없다.
이제 남은 삶을 여기에서 살기로 결정한 내가, 내가 사는 땅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자기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기도 한다. "말을 잘 못하는, 나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나는 '누구'인가"
미국에서 살면서, 말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언어구사 수준이 원어민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현실인식은 이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처절한 '자기애' 발동 프로젝트를 가동하게 만든다. "너는 괜찮다. 너는 잘났다."라는 이미지 메이킹을 수십 번은 해줘야 하며, 깨알같이 틀려대는 무수한 나의 실수들 틈에서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자기 이미지를 건설해줘야 한다.
영어를 틀릴 때마다 내가 나 자신을 까댔다가는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내 영어를 비웃어도, 나는 비웃으면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토닥토닥을 기본 무기로 삼아야 한다.
세계에는 50여 개의 다른 영어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억양도, 단어 사용도 모두 다르다. 영어 사대주의를 벗어나는 것, 내 악센트가 좀 다르더라도 뭐 어때, 의사소통만 잘되면 됐지, 하는 막무가내의 마음이 필요하다.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날 죽이지 말고 차라리 영어를 죽이는 걸로, 마음을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