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not that
오래전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정의함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이 전통의 유래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고 만난 사탄과의 대화라고들 한다.
우리는(이라고 쓰고 '많은 한국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읽는다) 종종 예수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조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마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신성모독일지도. 그래서 종교의 아름다움은 '신비'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수 안의 신성과 인성은 100% 그리고 100%,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 완벽한 신성과 완벽한 인성을 이야기할 때 종종 완벽한 신성을 이야기하느라 예수님의 완벽한 인성을 잊을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완벽한 사람'은 어떤 의미일까?
보통 한국교회에서는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의 연약함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육체의 연약함만이 사람의 사람됨을 의미할까? 우리를 사람 되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는 그를 통해 예수님의 인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밤늦도록 하는 고민, 가슴 아픈 고통을 보고 함께 미어지도록 토해내는 울음, 무엇이 참인지 그른지 살피느라 피곤한 정신, 갓난아기가 지어주는 방긋한 웃음에 터질 듯 올라오는 큰 웃음소리, 고슬고슬한 밥 한 술이 주는 뜨뜻함에 내장 깊은 곳까지 내려앉은 외로움이 쑥 내려가는 것 같은 본능적인 감정... 이런 것들이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만약 생각한다면, 어쩌면 이런 순간들이 예수께도 있었다고 생각해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보내기 바로 직전에 요단 강가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가 참으로 기뻐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큰 목소리를 들었다. 신성으로서의 예수께서는 뭐 이미 다 아셨을지도 모르지만, '완벽한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하늘아버지의 이 목소리에 기쁨으로 요동치지 않으셨을까. 마치 학교에서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오면 기뻐하던 내 부모님의 모습에서 기쁨으로 가득 차던 내 어린 마음처럼 말이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언어를 들은 기쁨으로 요동치는 심장과 함께, 예수께서는 광야로 들어가셨다. 40일 낮, 40일 밤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영광스러운 세례의 순간도 어느덧 아득한 예전 일처럼 느껴지진 않았을까. 아득하고 황량한 공간에서 굶주린 이 젊은 육신의 메시아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히브리 문학에서 40은 영원,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영원과도 같은 고통.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 Sermon for Every Sunday의 공동창립자 중 한 사람인 미국 리치먼드의 Jim Somerville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완벽한 사람이기도 한 예수는 이 40일 동안 "What does it mean to be the beloved Son of God? What is the beloved Son of God supposed to do?(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된다는 게 의미가 뭘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은 뭘 해야 하는 거지?)를 고민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마치 우리가 성장하고 한 사람의 몫을 해내야 하는 성인이 되었을 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나는 대체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으로서의 예수께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셨던 건 아니었을까.
짐 소머빌은 심지어 마귀가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을 주진 않았을까? 하고 가능성을 던진다. 마태복음 4장, "그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지만 이 마귀의 요구를 듣는 순간, via negativa, 부정의 길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로서 그것은 내가 할 행동이 아니야. "No, not that." 그렇게 예수는 마귀가 계속 요구한 두 번의 요구를 모두 같은 방식으로 거절한다. "No, not that."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지워나감으로써,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세상이 다 보는 공중에서 뛰어내려서 찬사를 듣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섬겨 명예와 영광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할 행동이 아니었고, 그것은 예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Via Negativa, 부정의 길은 그 이후로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을 찾는 데도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 되었다. 요새는 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마는.
'내가 아닌 것'을 발견함으로써 '참된 나'를 찾는 것은 독특한 방식이다.
'내가 누구인가',
오래도록 나를 불안하게 만들던 질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직업이나, 학력 같은 것들이 아닌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고되고 긴 작업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용하신 '부정의 길'이 이 질문에 답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이를테면,
나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사람은 아니다. (최근에 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데에 따른 쓰라린 깨달음이다)
혹은,
나는
아픈 고양이를 (나는 두 마리의 아픈 고양이를 키운다)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등등과 같다. 하나씩 내가 아닌 것을 지워나감으로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더 알아나간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워나간다.
교회력으로 재의 수요일과 함께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예수의 광야를 동참하는 절기인 이번 시즌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조금 더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닮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