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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Apr 23. 2023

어릴 적 변비약

어느 겨울밤의 일이다. 지금도 집 문 밖만 나서면 변비에 걸려 여행길이 변비길이 되는 나는 어릴 적에도 매한가지였나 보다. 몇 살 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전일이 불현듯 기억이 났다. 분명 매우 어렸다. 외갓집 아랫목에 누운 내 두 발목을 들고 엉덩이에 좌약을 밀어 넣던 엄마의 얼굴이, 난데없이 몇십 년 만에 갑자기 그 긴 시간을 지나 마치 며칠 전 일인 듯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적어도 네댓 살은 되었을 테고, 그것보다 컸으면 좌약 자체를 격렬히 저항했을 것이 뻔하니 (약의 효과고 뭐고 엄마도 남인데 설마 엉덩이를 까고 좋아했을 리가) 이 기억은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생의 최초의 기억 중 하나일 테다.


군불을 떼 뜨뜻했던 아랫목과, 창호지 바른 나무격자문과 흙벽을 통과한 외풍이 들어 따뜻한 바닥과는 반대로 코끝이 시린 방안 공기, 내 하얀 발목을 잡은 웃는 얼굴의 앳된 엄마의 얼굴. 외숙모가 옆에서 두런두런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나를 보며 웃고 계셨으니 유쾌한 둘의 성격상 보나 마나 약 넣는 아기 궁둥이에 대해 농담을 하고 계시지 않으셨을까. 얼마나 나는 어렸던 거지? 아기 엉덩이에 좌변약을 밀어 넣으며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해사한 얼굴의 젊은 두 여인.  유쾌한 둘 덕에 왜인지 엉덩이를 깐 어린 나도 그 둘과 함께 즐겁다.


그 시골집에는 그때의 외숙모가 이제는 호호 할머니가 되어 여전히 살고 계신다고 했다. 백 년이 넘은 기와집인 외갓집은 지금은 나름의 현대화 과정을 거쳐서 부엌이나 화장실이 지금 우리가 익숙한 형태로 바뀌었지만 내가 어리던 시절엔 툇마루가 있고, 마루 밑에는 나비가 있었고(왜 예전엔 고양이는 모두 나비라고 불렀을까), 깊은 우물이 있고, 아궁이가 있고, 뒤채 뒤에는 숨어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요강을 썼고, 겨울엔 화로에 밤을 구워 먹었고,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숯을 넣어 쓰는 철쇠 다리미도 있었다. 


ㄷ자 모양의 깊은 안마당은 어린 나에겐 마치 우주처럼 넓어서 쇠죽을 끓이는 외삼촌 곁에서 나는 물에 끓여지는 풀의 눅진한 냄새와 매캐한 장작 타는 냄새를 맡으며 한없이 뛰어다니곤 했다. 그 마당에서 어른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웠고, 소가 매여있는 옆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을 기다려 받아먹기도 했고, 우사 옆 방아에서 추석 떡을 빻는 어른들의 진기명기에 나올 것 같은 기막힌 타이밍-방아 한쪽에서 발로 방아를 누르는 이모와, 방아가 올라간 틈에 얼른 손을 넣어 방아 반대쪽 떡을 다져주는 외숙모의 찰떡호흡-을 보며 저러다 손을 찧지는 않으실까 아슬아슬하게 지켜보기도 했었다. 


내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시골마을 출신이신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두 시골마을 풍경이 참 다르다. 아버지의 마을은 훨씬 작았고, 아주 깊은 산골 우묵하게 패인 작은 공간에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험한 산이 끝없이 이어지는 그 중간 움푹 파인 곳에 자리한 탓에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졌다. 일찍 지는 해 탓에 내가 기억하는 친가의 마당은 따뜻한 석양으로 색칠되기보다는 별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이다. 산에서 범내려온다는 할머니의 협박성 조언에 평상에 누워 하염없이 별을 보다 부리나케 들어가 문을 걸어잡그 고 숨죽이며 범이 나를 스쳐가기만을 바라며 잠이 들곤 했다.


그에 반해 외갓집은 너른 평야 한 가운에 자리한 널찍한 집이었던 탓에 내 기억 속 그 집의 저녁은 붉은 노을이 풍성하다. 햇살이 마당을 가득하게 채우고, 집 뒤편으로 벼가 가득한 논이 가득 펼쳐진다. 저녁노을이 빨갛게 안마당을 물들일 때 남자어른들은 땔감을 떼 물을 끓이고 여자어른들은 부엌에 모여 아궁이 군불로 큰솥단지에 밥을 지었다. 대가족이었던 외갓집은 항상 사람 소리로 북적였고, 나는 외갓집의 왁자지껄한 저녁을 참 사랑했다. 


아- 나는 아름다운 시골집을 알고 있었구나!


새삼 그 어른들이 그립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을 아름다운 내 어머니와, 그보다 몇 살 더 많지도 않았을 외숙모가 새삼 보고 싶다. 군불에 꺼멓게 그을린 아랫목에 깔린 그 밑에 깔리면 꼼짝달싹도 할 수 없을 만치 두껍고 무거웠던 바스락거리는 솜이불과, 이불 바깥으로 내놓은 코가 시린 그 겨울 공기가 그립다. 뒷마당으로 가는 안방에 난 작은 들창을 열면 보이던 빨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꽃들이 있는, 그 외갓집이 오늘 갑자기 무척이나 그립다. 


나보다도 더 어렸던 맑은 얼굴의 엄마가 참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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