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솦 솦 Mar 22. 2023

우울한 그대여

한참을 우울했다

한참을 우울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느끼는 우울을 색깔이 점점 진해지는 사다리형 표처럼 수치화해서 느낄 수 있는데, 이번엔 우울증약을 복용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단계, 

내 표에서는 노랑과 주황을 지나 붉은색으로 접어드는, '경고'등이 희미하게 반짝이기 시작하는, 

그런 우울이었다. 

지금에야 희미하게 반짝였다고 표현할 수 있지, 

한참 바닥을 찍을 때는 '급성우울증'이라고 내가 나 자신에게 진단을 내렸다. 

이토록 날카롭게 후벼파는 듯한 통증이 참 오랜만이구나, 

어쩜 이렇게 아플수가 있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우울한 이후에, 

아주 천천히 급하게 바닥을 찍은 후 다시 올라가는 시점에,

오랜만에 집에서 일하는 지금 아침, 

문득 창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반갑다고 느껴진다.

고양이 두 마리는 창가의 다람쥐와 새를 보느라 여념이 없고, 

유투브로 틀어놓은 피아노 소곡은 공간을 살짝 부족할만큼 남겨두고 따뜻하게 채운다.

두번째 내린 커피도 따뜻하게 내 뱃속을 덥혀준다.



내 우울은

내 기질에서도 기인한다.

생각이 많고 깊게 하는 성격,

낙관적이기 보다 비관적인 생각의 패턴,

과거 어디에선가 큰 상처를 입은 기억으로

내 뇌는 매년 그 맘 때가 되면 그 상처를 기억하고 감정을 되뇌인다.


아픈 마음의 무게가 마치 날카로운 과도로 후벼파듯이 느껴질 때,

우울한 그대여,

그 날 하루라도 잘 살아내기를.


아직 나는 우울하다. 아주 천천히 경고등이 켜진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조심스레 애를 쓰는 중이다.


내가 지내는 시카고에는 로욜라 대학이 있는데

그 대학 농구팀은 103세의 수녀님이 채플린(이자 마스코트)이시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환한 미소로 매번 로욜라 대학 농구팀의 경기를 방문하셔서 

기도를 해주시고 경기를 응원하는 에너지 많은, 유머가 넘치기까지 하는 할머니 수녀님은,

그녀의 자서전에서 (제목마저 환상적이다 - “Wake Up with Purpose: What I’ve Learned in My First Hundred Years,” (목표와 함께 일어나라: 내 첫 100년 동안 내가 배운 것) 자신이 103세까지 살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아침 네시 반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하루를 위해 기도를 하지요. 그리고 그 날 할 일들을 적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그 날의 목표가 됩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우리의 과거 혹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낸다.

그러나 우리 모두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것과,

미래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날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마치 그것이 나의 삶에서 가장 큰 목표인 듯이

살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수녀님의 글을 읽은 후,

아침마다 침대에서 간단한 기도를 하고,

그 날 해야할 일들을 정리해본다.


오늘 내가 가장 열심히 해야할 일은,

고양이 두 마리를 사랑하는 것과,

오후에 있을 미팅을 참석하는 것,

그리고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다.


고양이 털을 빗어주면서,

그 일이 내가 오늘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다. 

아침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가늘게 든 고양이의 털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걸 보면서,

나는 내 목표 중 하나를 이룬 것이 행복하다.


때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그로 인해 불행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오늘 하루 지금 이 시간으로 충만할 수도 있던 거였다.



Way to go, sister Jean!


매거진의 이전글 혹이 난 비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