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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Feb 28. 2018

Alias Grace

Drama Review



감옥에 갇혀 있는 그레이스


넷플릭스로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본다. 가끔 머리를 식힐 겸, 혹은 러닝머신에서 운동을 하며 보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정말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정말 사로잡혀 하룻밤을 꼬박 새며 끝까지 달리기도 한다. 앨리어스 그레이스는 내게는 그렇게 드물게 매력있는 드라마였다. 
여성주의적 작품이라는 어떤 평론을 우연히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생각보다 깊고, 느리지만 농밀하게 여성의 심리를 파내려 가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19세기 말 캐나다로 이민 온 아일랜드 이주민 출신인 그레이스가 종으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 한 시골 마을의 농장주의 집에서 일하게 된다. 6개월 후 집주인과 집주인과 내연관계에 있던 다른 여종을 농장에서 말을 관리하던 다른 남자와 함께 살해한다. 그 남자 종은 살해를 주도한 죄로 즉시 사형되고, 그레이스는 공모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레이스는 살인에서 주 피의자가 아닌 악세사리에 불과했다고 믿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재심리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심리분석학자가 그녀와 면담을 시작한다. 그는 그녀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매일 찾아오고, 그에게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숨어있는 욕망, 억압된 자아, 분열된 기억. 

심리분석학자는 이십 대의 매우 잘 생긴, 전도유망한 청년이고, 16세에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온 그레이스는 이제 겨우 삼십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드라마 곳곳에서 그레이스가 지나갈 때마다 남자들이 끌린 듯 쳐다보는 장면이 계속 삽입된다. 남자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레이스를, 그녀의 아름다움을 선망하거나, 아니면 아름다움의 껍질을 입힌 사악한 마녀로 경멸하는 시선이다.

심리분석학자, 사이먼 또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모든 여성들은 사이먼에게 일방적인 호의를 보내며 알 수 없는 질투심으로 사이먼과 매일 밀폐된 공간에서 대화하는 그레이스를 적대적으로 대한다. 그레이스는 남자들의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대상화되고, 여성들에게는 일방적으로 적대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레이스.


그런 둘이 상담을 위해 매번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 내밀하고 친밀한 그레이스의 기억들을 더듬으며 일어나는 화학작용 또한 주목할 만하다. (프로이트도 정신분석가와 내담자 사이에서 일어났던 감정작용에 대해 쓴 글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에 따르면 아마 안나 O라는 내담자에 대한 글이 이에 관련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이먼과 그레이스의 감정은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나 둘의 의식은 둘의 꿈을 통해 형상화된다. 사이먼의 꿈은 비교적 직접적인 데 반해 (그레이스에 대한 성적 욕망), 그레이스의 꿈은 사이먼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눌린 자아, 억압된 분노라고 읽는 것이 더욱 옳을 것 같다. 

심리학은 아주 오래 전에 배운 게 다인 터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프로이트는 여성의 사회적 억압과 그로 인해 억눌린 욕망과 욕구의 분출이 히스테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분노해도 분노할 수 없고, 원해도 원하지 않아야 하며, 원하지 않아도 원해야 하는 모순된 굴레 속에 갇힌 여성의 삶. 이런 여성의 삶은 종종 남자의 시선 안에 갇혀 성녀 아니면 창녀, 혹은 순진한 아가씨 아니면 마녀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제한되고 한정된다. 

아름다운 그레이스는 그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부족하다. (사회적 장치가 있더라도 여성은 항상 무언가가 부족하겠지... 그 때나 지금이나.) 그녀를 탐하는 남성들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그녀는 끊임없이 원해지고, 탐해지며, 소비된다. 그녀의 주체는 선명히 포착되지 않는다. (아니, 사회적으로 그녀의 주체성에 누가 얼마나 관심이 있었겠는가, 그레이스 그녀 자신 말고.)

그녀의 주체는, 그녀의 분노는, 그녀의 자아는 결국 메리 휘트니라는 별개의 인격체를 그레이스 안에 만들어내고, 그 둘은 분리된 인격으로 살아간다. (드라마는 이 부분을 확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지는 않는다.) 끝없는 타인에 의한 고난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분노하지만, 사회적으로 눌리고 억압당한 그녀의 주체는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고, 분노는, 그녀의 주체성은, 자아는 결국 메리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낸다. 

그레이스가 창녀인가 아니면 성녀인가, 그녀가 그저 순진한 아름다운 여성인가 아니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남자들을 홀리는 악녀인가를 두고 심리분석학자는 끊임없이 고민하다 결국 파멸한다.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시작한 면담이었지만 사이먼은 결국 그녀가 무죄라는 편지를 쓰는 것을 거부하고, 미국의 남북전쟁에 참여했다 부상으로 전신마비라는 후유증을 입는다. 오랜 재활치료에도 불구하고 언어능력도, 신체능력도 되돌아오지 않는 그.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레이스에 대한 그의 감정은 성욕이었을까 혹은 사랑이었을까? 혹은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Well, I'd sa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two. He almost raped the landlady who had tried to seduce him right after he refused to write a letter for proof of Grace Mark's innocence. After the forceful sex with the landlord lady, he insulted the lady by saying that this is what he had always wanted to do with someone else, not you. She burst into cry because she realized she was not "wanted" but raped. Well there again. If she thought that was "her" choice to have sex with him subjectively, it would be just sex. Should she be wanted by him? Can women not be wanted?)

반면, 결국 누구의 그레이스도 아닌 그레이스는 사실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몇번을 되뇌였던 것처럼, “At the end, everything will be fine.” 결국 그녀는 살아남는다. Resilience. 결국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여성은 살아남는다. 그녀는 결국 그녀 혼자만이 아닌 그녀의 삶에서 만난 다른 여성들, 메리와 낸시, 동지와 적, 모두를 끌어안고 살며 그들을 모두 자신 안에 녹여낸다. 그들은 하나이며, 타인과 나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여성의 생명력은 이 하나됨에 있으며,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남성 심리분석가와 다른 점이다. 남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만, 결국은 그 셋을 모두 자신 안에 녹여내며 (자신을 잃지 않으며. 타인이 말하는, 원하는, 한정하는 자신이 아닌 자신을 이루어내며), 천국의 나무를 완성해낸다. 

좋은 드라마였다. 소설이 바탕이라는데, 마치 글로 읽듯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게하는, 풍성한 구도와 이야기였다. 로튼토마토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걸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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