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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Dec 08. 2018

Interpreter of Maladies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브런치를 통해 알게 된 한 분의 글에서 만나게 되어 읽게 된 책이다. 한국에서도 "축복받은 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출간된 것 같다. 버락 오바마도 좋아한다고 여러 번 언급했던 작가이고, 퓰리처상을 받은, 천재 같은 작가로 묘사된다. 내가 알기로는 이 책이 그녀의 첫 책이고, 이 책으로 퓰리처를 수상했다. (아우 천재들 진짜.)


인도계 미국인, 인도계 2세인 작가는 그녀의 세계를 읽어 내려간다. 다른 인종, 다른 문화의 배경을 가진 채 미국이라는 또 다른 문화에서 자란, 두 세계 모두에 발을 담근 2세의 눈으로 삶을 그린다. 인도계 2세의 글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2세는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미국에서 여러 해 살다 보니, 여러 위험성이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특정 민족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를 가지는 경향이 있다. 정말로 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민족적 특징이라는 말만큼 위험한, 신화화된 개념이 어디 있겠는가. 

위험성을 앎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혹은 어쩔 수 없이, 내게도 특정 민족에 대한 편견(혹은 고착된 이미지)이 있는데, 이 중 인도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명석, 경쟁적, 혹은 천재"이다.

카스트 제도의 영향이 아직 활발한 문화이다 보니 미국에까지 이민오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비교적 카스트가 높은 사람들이고, 그렇다 보니 내가 만난 사람들은 인도에서도 높은 교육을 받고, 그 안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몇 억의 인구 중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낸 사람들. 자신들이 얼마나 경쟁적이어야 여기까지 올 수 있겠느냐고 농담을 하는 인도 친구도 하나 있었다. (너무 경쟁적이라 그 친구 별로 안 좋아한다.)  

대형병원들은 이제는 거의 반이 인도 출신 의사로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정도다. IT 업계와 의료계는 인도 출신이 아니면 이제는 위험하다는 농담까지 한단다. 


단 한번 불가촉천민 출신 이민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불가촉천민이 미국에까지 공부하러 오기 위해 몇 배는 더 똑똑해야 했던 경우였다. 그러니, 내가 만난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매우 똑똑하다는 결론... 


어쨌든, 명석, 경쟁적, 혹은 천재인 인도인 2세의 글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의 단편은, 내게는, 한 단어로 묘사된다. poignant-

담담하고, 감정을 범람하지 않으며, 서늘한 오늘 저녁의 한 순간을 묘사하는 것 같은 차분함 속에 왜인지 알 수 없게 숨어있는 그녀만의 '가슴 저미는' 문장들. 사랑이 식은 젊은 부부의 저녁식사를 묘사할 뿐인데, 내게는 그들의 사랑이 식어 아스라이 재로 부서지는, 그 공기의 먼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어로는 읽어보지 못해서 이 가슴 저미는 표현들이 어떻게 번역되었을지 매우 궁금하다.


책은 아홉 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홉 개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풍성한 일대기를 가지고 그 짧은 글 안으로 살아 들어온다. 아주 짧은 소설에 등장하건만, 마치 그들의 삶이 아주 묵직하게 함께 읽힌달까. 마치 장편 소설의 한 챕터를 읽은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아닌 순간의 그 가슴 아픈 진실을 침착한 어조로 전하는 라히리의 글은 아름답다. 

영어도 심지어 어렵지도 않다. 그러나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녀의 장편을 이어서 읽어볼 생각이다.


줌파 라히리는 글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 자체도 매우 흥미롭다. 몇 해 전 그녀는 이탈리아로 이민을 가서, 얼마 후 이탈리아어로 첫 산문집을 냈다. 인도계이므로 영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자랐다 하더라도 아주 간단한 뱅골어 정도는 이해를 하리라 생각을 하고, 영어로 자란 그녀는, 이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 자신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 그녀는 왜 그 길을 택했을까? 언어 노매드-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여정'에서 찾는 걸까.


그녀의 완전한 언어인 영어가 아닌 불완전한 이탈리아어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무엇일까.

그녀의 정체성은 노매드에 있다. 완벽한 미국인일 수 없는 그녀의 피부색, 어느 언어도 완벽히 자기 것일 수 없는 타자로서의 외로움, 뱅골어도, 영어도 아닌 이탈리아어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그녀의 새로운 노력은, 어떤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그녀의 여정이 너무 매력적이다. 그녀의 길에서의 삶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여정 어디에선가 이민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민자의 삶은 끊임없는 길 위에서의 여정, 세계와 세계 사이의 비좁은 공간에 존재하는 나를 발견하는 끊임없는 자리매김에의 욕망, 어느 곳에도 완벽하게 속할 수 없는 이물적인 존재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싶은 공허한 박탈감이랄까.


사실 우리는 어디에서나, 언제나 완벽히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한 개인이, 한 정체성에 완벽히 맞아들어간다는 것이 가능한가? 한국에 한국인으로, 한국어를 말하고 들으며 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다.

다만 낯선 곳에 떨어진 초라한 여행자의 신분이 그 현실을 조금 더 날카롭게 깎아서 보여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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