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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an 02. 2019

버드 박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군요. (살짝 있습니다)

경향신문에 버드 박스의 리뷰를 비교적 상세하게 (가득한 스포일러와 함께) 실었길래 옮겨 담는다. 간단한 줄거리가 보고 싶다면 이리로 가시는 것도.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12241351001


책이 원작이라는데 아마 책을 보면 영화가 묘사하기를 포기한 부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 같다. 아마 영화는 앞뒤 상황을 설명하는 것보다 앞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와 반응을 더 잘 묘사하기로 결정한 게 아닌가 싶다.  

몇몇 스토리 전개의 클리셰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 로튼토마토의 90%라는 꽤 준수한 평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순히 서걱거리는 공기의 움직임만으로도 우리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인다. 짧은 시간에 생존자들 사이의 연대와 불화, 인간애와 광기를 잡아내려는 시도가 조금 숨 가쁘고 설익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 모든 연결고리를 공포라는 키워드와 버무려 잘 조합해낸다.

또한 최근 몇 해의 산드라 블록의 필모그래피는 훌륭하다.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었던 그녀는 이제는 무겁지 않지만 인생 이야기가 담긴, 삶의 단면을 잡아내는 (철저히 내 기준에서) 좋은 영화들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심지어 살짝 생각 덜하고 만든 게 아닌가 싶은 오션스 에잇에서조차도 그녀의 연기는 다른 눈부신 여배우들의 연기와 더불어 영화의 퀄리티를 높인다. 


버드 박스


모성애, 인간애, 희망, 내일과 같은 단어들이 표상하는 삶을 살아낼 것인가, 아니면 생존을 위해 포기할 것인가.

이 질문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맞닥뜨린 인간이 매 순간 내리는 결정에 영향을 끼친다. 끝까지 인간다울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그 안에서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끝없이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맬로리(산드라 블록)는 그녀 자신의 시니컬하고 염세적인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인간답기를 선택한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가졌지만 낳고,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 세상에서 끝까지 희망하기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보기를 선택하는 것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캐릭터이다.


95세 눈먼 할머니


영화에서 공포를 표현하기 위해 종종 카메라는 스카프로 눈을 가린 맬로리의 시각을 재현한다. 칭칭 동여 멘 스카프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과 불안한 외부의 소리는 다른 인지능력이 감지하는 소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공포를 숨이 막히도록 잘 전달한다. 무언가의 소리가 들리지만 눈으로 그 위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주는 엄청난 공포.   


영화가 시각차단이 주는 극한 공포를 기초로 한 영화이다 보니, 내 생각은 자연스럽게 95세의 눈먼 할머니에게로 옮겨간다. 동네축제에서 장차 남편이 될 첫 남자 친구와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던 예쁜 열여섯 시절 이야기를 아직도 홍조를 띠며 이야기하는 할머니는 올해 아흔다섯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물을 희미하게 구별하던 시력은 이제 그 마지막 몸부림마저 힘을 잃어 더 이상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한다. 앞은 보지 못하지만 학습을 통해 보지 않고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배워 민첩하게 움직이던 맬로리와 달리, 할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오래된 보청기는 최대한 볼륨을 높여도 상대방의 목소리를 잘 전달하지 못한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다. 이 제한은 내 세계를 끔찍하게 축소시킨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움직일 수 없는 나는 누구인가? 내 몸에 대한 컨트롤을 잃은 나는 어떻게 나를 '주장'할 것인가.

아흔다섯이라는 그녀의 나이에 비해 그녀가 정정하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많은 이들이 아흔다섯까지도 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보지 못함, 듣지 못함, 움직이지 못함을 나는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버드 박스>의 맬로리를 보며 드는 생각은 아흔다섯의 할머니 본인에게도 그 좁아진 세상이 당연한 것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지난 4년 간 보아온 할머니는 자신의 세상이 작아지는 것에 격렬히 저항했다. 휘청거리면서도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오르내리셨고, 들리지 않지만 매번 이야기 모임에 참석하고, 젊은이가 20분이면 읽을 책을 삼일에 걸쳐 매그니파이어 (거대 돋보기 컴퓨터로 작은 활자를 크게 화면에 띄워주는, 시력이 아직 조금 남아있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책 읽기 기계)로 읽으신다. 요양원에 들어가시라는 가족들의 권유에 불같이 화를 내며 보이지 않는 눈, 제대로 구부릴 수 없는 무릎으로 자신의 집의 정원을 관리한다. 


"사람 되게" 사는 것에 대한 생각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인식하는 늙은이의 좁아지는 세상에 격렬히 혼자서 저항하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또한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맬로리와 그녀의 두 아이를 생각하며, 문득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주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흔다섯, 내일 당장 죽어도 아무도 서러워하지 않을 나이를 홀로 살아가는 것. 함께 살아가던 자식조차도 앞장 세우고, 남편도 먼저 보내고, 하루 스물네 시간을 적막한 고독 속에 살아가는 할머니를 '사람 되게' 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 스토브에 불을 붙일 수 조차 없어서 전자레인지에 팝콘을 튀겨 저녁으로 먹어야 하는 이 외로운 삶에 할머니가 싸워내는 전쟁에 박수를 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죽고, 세상은 이제 기약 없는, 희망 없는, 내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어두운 종말의 시대를 사는 맬로리를 '사람되게'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섯 살이 되도록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는 맬로리와 이름 없는 소년과 소녀. 무엇이 그들을 '사람되게' 하는 것인가. 


아무것도 사랑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희망이 없는 우리는 여전히 인간인가?

지금 이토록 당연히 즐기는 것들이 없어도 우리는 살 수 있는가?




영화의 결말은 예상외로 쉽게 다가오고, 약간은 허무하게 영화는 끝이 난다. 


격렬하게 희망하기를 두려워하던 맬로리는 결국 희망하기를 선택하고, 소년과 소녀로 불리던 두 아이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다. (사실 이 부분에서 설득이 안됐던터라.... 그토록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그녀가 왜 갑자기 어디에서 그런 희망을 찾았대?하는 마음. 아마 소설에서는 더 자세한 묘사와 함께 설득될 수 있었겠지...하면서 내가 나를 설득시켰다.)


디스토피아적 세상에서 그들만의 작은 유토피아를 찾아낸 맬로리와 두 아이. 아주 예전에 영화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보러간 영화에서 작은 유토피아로 사람들이 도망갔는데 거기에서도 좀비떼가 달려나오는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었었다. 아니면 <라이프>처럼 기껏 도망나갔는데 괴생명체는 지구로 가서 마저 사람들을 도륙내고 정작 주인공은 구명정을 잘못타서 우주미아가 된다던가 하는 그런 찝찝함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하여튼, 볼 만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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