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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Apr 30. 2018

"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망각, 기억, 그리고 용서"


"남아있는 나날"을 읽고 나에게는 낯선 이 작가에게 빠져들어 연달아 그의 다른 책을 주문했다. 문고판을 주문했으면 좋으련만 한국에서 배송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아까워 바로 다운로드 받아 읽을 수 있는 태블릿용을 주문했더니 읽는 시간이 배로 걸렸다. 보통 잠자기 전 메디테이션 비슷한 시간처럼 책을 읽는 나로서는 밝은 태블릿 화면으로 읽는 책이 읽기도 쉽지 않았고, 잠드는 데도 방해가 되었다. 다시는 이렇게 책을 사지 않으리라...! 얼마나 다짐을 했는지.


"남아있는 나날"과 비교해봐도 글의 호흡이 느린 편이다. "남아있는 나날" 또한 영국 시골의 대저택이 배경(마치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처럼)이라 하루가 긴 전원저택 안에서의 지난 일들을 여행하는 동안 되새겨보는 한 늙은 집사의 이야기인데, "파묻힌 거인"은 거동이 쉽지 않은 두 늙은 부부가 아들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만나는 이들과, 도깨비, 기사들, 그리고 용의 이야기이다. 톨킨 같은 판타지물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 "파묻힌 거인"은 판타지물의 단어과 색을 입은, 오히려 르포 같은 느낌이었다. 두 부부의 느린 걸음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며, 이들의 여행은 내내 불안하고 답답하며, 다정하고 희미하다. 



브리튼족의 늙은 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어느 날 가까운 마을에 사는 아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때는 아서왕이 고대 영국을 통일하고 아서왕의 전설을 벗 삼아 아서왕의 브리튼족과 침입 민족인 색슨족이 함께 평화롭게 어우러져 살아가던 때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안개에 가려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의 현재는 평화롭고,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어느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그 둘. 어느 날 문득 자신들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억의 편린으로 인해 그들은 무작정 아들을 찾아 길을 떠난다. 아들이 어느 마을에 사는지, 언제 그들을 떠났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액슬과 비어트리스.


여행의 여정에서 그들은 많은 이들을 만나고, 많은 도움을 받는다. 브리튼족을 위해 봉사했지만 배신당한, 복수를 원하는 색슨족 전사 위스턴, 아서왕의 영광을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늙은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경, 그리고 도깨비에게 물려 살던 마을에서도 쫓겨난 후 납치된 어머니를 찾아 나선 에드윈. 이 세 사람이 줄곧 액슬과 비어트리스와 그들 여정의 많은 부분을 함께한다.


여행의 여정에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그들이,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땅의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확실히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암용 케리그의 호흡 때문임을 알고 암용 케리그를 죽이러 나선 위스턴을 도와 케리그를 죽이러 간다. 암용의 호흡이 사라지면 잃어버린 자신들의 기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그러나 잃은 기억을 찾는다는 소망은 불안을 동반한다. 현재의 우리는 이토록 행복한데, 잃어버린 기억이 우리가 '잃어버렸어야 할' 기억이었다면 어쩌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 망각이 오히려 축복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불안을 무거운 물처럼 헤치며 늙은 몸을 간신히 가누며 앞으로 나아간다.


위스턴은 암용을 죽여 사람들이 기억을 찾게 하고자 하고, 가웨인은 그런 그를 막아 사람들이 망각 속에서 조금 더 지내게 하고자 한다. 아서왕은 침입 민족인 색슨족을 학살하고 도륙함으로써 고대 영국의 평화의 시대를 열었지만 색슨족의 아이들이 자라서 다시 공격해올 것을 염려했고, 암용 케리그의 입김이 망각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마법사 멀린의 도움으로 브리튼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망각의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었다. 이 망각을 통해 사람들은 평화롭게 어울리며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고, 끔찍한 학살의 기억은 잊힌 것이었다.


"남아있는 나날"처럼 "파묻힌 거인"도 느리지만 끈질기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가장 마지막에 절정이 들어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느리게,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하게 만들 정도 느리게, 하지만 끈질기게 늙은 집사의 기억을 훑던 이시구로는 "파묻힌 거인"에서도 마지막에, 두 노인의 여정의 끝에 모든 이야기들을 숨겨놓았다. "남아있는 나날"의 마지막에서 삶의 환희과 목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아름다웠던 순간처럼, "파묻힌 거인"의 마지막은 망각과 기억, 용서의 아픈 춤을 본 느낌이다. 


책을 읽은 후 찾아보니 "파묻힌 거인"은 유고 내전과 르완다 학살에서 영감을 받아 쓰인 글이라고 한다. 불완전했지만 실재했던 임시 평화협정을 깨고 색슨족을 학살하고 일방적인 평화를 선언했던 브리튼의 아서왕, 살아남은 자들로 인해 돌아올 복수를 염려해 강제로 걸어놓은 망각의 마법. 자신들의 처절한 살육의 기억,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은 채 현재의 즐거움을 강요받았던 색슨족은 과연 행복했을까? 가해자인 것을 잊은 채 살아가는 브리튼의 소박한 현재는 그들에게 타당한 현재인가?


위스턴에게 망각은 저주였고, 가웨인에게 망각은 평화였다.

위스턴의 색슨족은 돌아온 기억과 함께 브리튼족을 대항해 다시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기억해버린 과거의 고통은 지울 수 없는 분노로 돌아온다. 암용 케리그의 망각의 선물로 잠시나마 평화로웠던 브리튼 땅은 이제 다시 서로를 죽이는 학살의 땅이 될 것이다.


도깨비에게 물린 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를 찾으러 오라는 납치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소년 에드윈의 존재도 의미심장하다. 아이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길을 찾아나서고, 아이가 가는 곳의 끝에는 암용 케리그가 있다. 케리그가 죽는 순간 아이의 머리에 들리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끝이 난다. 아이는 타고난 용사이고, 좋은 용사가 될 것이다. 

아이는 미래의 또 다른 케리그가 되는 것일까? 색슨족과 브리튼족의 대학살이 다시 시작될 이 땅에서 아이는 그 다음 망각을 가져올 또 다른 시작인 것일까?


액슬과 비어트리스에게로 돌아가서, 모든 기억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는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천천히 아들이 있는 곳을 기억해낸다. 이토록 망각의 품에서 서로를 사랑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한 때 서로에게 충실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어마어마한 상처를 남겼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러나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의 사랑을 증명하고, 아들이 있는 곳에 닿는 배를 타게 된다. 작은 보트라 두 사람이 함께 건널 수 없어서 둘은 소설이 시작한 후 난생처음 헤어지게 되고, 비어트리스를 먼저 보낸 후 액슬은 바닷가에서 돌아올 나룻배를 기다리며 소설이 끝이 난다.


망각의 선물 속에서 쌓은 사랑은 망각이 사라진 후에도 그들은 서로의 곁에 남을 것인가? 그들은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닷가에 남은 액슬은 그다음 보트를 타고 비어트리스가 먼저 도달한 섬에서 다시 손을 잡고 남은 여생을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그 섬의 다른 사람들처럼 결국 혼자가 될 것인가.


망각이 지워진 후의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용서'이다.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가?

마지막 장에서 액슬은 뱃사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더디게 낫는 상처도 결국 다 낫게 마련이지요.


이시구로는 망각과 기억, 그리고 용서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옳지 않은 망각과, 고통스러운 기억, 그리고 무엇도 전제되지 않은 용서의 관계는, 아마도 쉽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혹은 책을 읽는 우리는 "기억하는 우리는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알라딘에서 아무렇게나 주문해 읽은 책들 중 이시구로의 책이 내게는 가장 아름답다. 삶의 가장 어두운, 아픈 순간을 건조하게 잡아내는, 마치 추운 겨울날 건조한 피부가 겨울 차가운 삭풍에 베여 피가 나는 것 같은 아픈 글들 속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사람의 체온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 대해, 실패한 삶에도 '목적'은 있음을 ("남아있는 나날"), 세월 안에 숨어있는 '용서의 힘'을 ("파묻힌 거인")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도 우리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이시구로의 글이 참 좋다. 마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게 하는 '생각하지 않은' 죄로 실패한 인생이지만 ("남아있는 나날"), 그래도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는 아름다운 저녁이 있는 삶. 

어렵고 힘든 여정을,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서로의 품을 안은 체온으로 버티며 견뎌내는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사랑.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힘듬을 사랑으로 견뎌내는 두 노부부의 헌신적인 애정. 

우리네의 삶에서 우리가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나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아름다운 저녁과, 늙은 내 손을 잡아주는 함께 늙은 이의 따뜻한 손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반했고, 아마도 한동안 이 사람의 세계에 천착해 지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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