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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May 01. 2018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이 리뷰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을 처음 읽은 후 쓴 글로, 물론 지금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까지 탄 엄청난(!) 작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자명이 일본인이라 일본인이 쓴 글인가 했더니 어릴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간 일본계 영국인의 글이다. 쓰는 책들마다 맨부커나 부커상 같은 상을 받는, 저자를 소개하는 글의 어조로 보건대 꽤나 글쓰기의 천재인 것 같은 이가 지은 글이다. 꽤나 재밌었지만 잠자기 전 몇 장 읽고는 금세 잠에 빠져들고는 해서 한참을 읽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저자의 책을 몇 권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로 너무 좋았다.
개인적으로 글이 가볍게 느껴지거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을 무리해서 붙였다거나, 혹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유난함이 느껴지는 (어떤 면으로든. 문장이 유난하게 화려하거나, 혹은 내용이 유난하게 우울하거나) 글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은 꽤나 유명한 번역가가 번역을 한 책이지만 대개 소설 번역가들이 그렇다는데 시간이 촉박했던 탓인지 영어문장 구조가 그대로 느껴지는 번역들이 보여 조금 불편했지만 읽다 보니 오히려 그게 번역가가 의도한 것인가 싶기도 했다. 책의 화자인 스티븐슨 씨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는데 그의 어투도 아주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이시구로는 평범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로 스티븐슨을 그려냈고, 느리지만 정확하게 떨어지는 그림으로 스티븐슨 씨는 자신의 인생을 독자에게 전달했다. 그의 실패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마저 그의 떨리는 목소리와 자부심과 함께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결국 그의 인생은 그의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주인의 실패와 함께 실패로 끝났다. 여태 그는 자신의 주인의 실패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부두의 저녁을 밝히는 전구들을 바라보며 저녁이 하루의 끝이 아님을, '남아 있는 나날'이 있음을 그는 천천히 이해하게 된다. 
비록 인생의 모든 것에서 유의미한 것들을 추출해 낼 수 없을지라도-그것이 끝이 아님을 안다는 것. 와,  이 얼마나 엄청난 resilience인가.

그가 흠모하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그의 주인은 사실은 독일 패전 이후 나치가 독일에서 기세를 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모으는 데 큰 몫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명예를 중시하고, 의도가 순전한 사람으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패전국을 돕는 정도의 평화적 의미만을 두었을 뿐 나치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알지 못했다. 결국 그는 나치의 선전도구로서 영국과 세계 질서 안에서 요긴하게 소비되었을 뿐이다.
"순진함"은 악이 될 수도 있다는 이 역설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명예를 중시하고, 세계평화를 원했으나 결국 자신이 나치의 재기를 도운 가장 큰 역할을 했음을- 그리고 그런 주인을 무조건적으로 믿으며 오랜 기간을 모신 스티븐슨- 결국 악의 평범성은 '사유하지 않음'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이시구로는 한 나이 든 집사의 갈라지는 목소리를 통해, 그의 6일의 짧은 여행 안에서, 소박한 언어로, 함축적으로 전달해냈다. 

결국, 스티븐슨 씨의 인생 전체는 -만약 우리가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할 수 있다면- '실패'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토록 스티븐슨 씨가 알기를 원했던, 갖기를 원했던 인간의 품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타인의 고귀함을 말살하는 나치를 두둔한 사람이 노래하는 인간의 품위란 무엇인가?
그의 인생은 실패했다. 그의 인생의 모토와도 같았던 나리의 실패는 곧 그의 실패이다.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집사로서의 그의 가치는 결국 낯선 미국인-그가 생각하는 영국 신사로서의 가치를 모르는-에게 달링턴 저택과 함께 한 묶음의 떨이로 팔린다.

그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부두가에서 저녁때 켜지는 아름다운 전구들을 보며 그는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그만큼 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 될 수 있다는 것. 그 정도의 여유를 나 자신에게 준다는 것. 
그런 점에도 스티븐슨 씨는 매우 강한 사람이다. 실패에서 grudge 없이 일어난다는 것. 정말로 엄청난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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