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fulness

그토록 힘든 그것.

by 솦 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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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는 통에 예정에 없던 겨울옷 빨래와 정리, 여름옷 꺼내기를 하느라 한동안을 들썩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지은 지 백 년이 됐는데 백 년 전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라이프스타일에 맞춰져 있는 터라 백 년이 지난 후의 내가 살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예를 들면, 아주 작은 옷장이라든가.... 또 아주 작은 옷장 같은... (그렇게 작을 수가 없다) 백 년 전 농부들이 입는 옷은 농사짓는 옷과 교회 가는 옷 두 벌이 전부였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충분했겠으나 옷에 관심이 많은(이라고 쓰고 '미쳐있는'이라고 읽을 수 있다) 내게 백 년 전 농부들에게 충분했던 옷장은 너무 작아서 옷들을 모두 보관할 수가 없다. 다행히 집은 크고 사는 식구는 둘 뿐이니 이층의 비어있는 방에 다른 계절의 옷들을 보관한다. 즉 일 년에 두 번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옷을 내리고 올리는 수고를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기는 하다.


항상 날씨는 생각보다 빨리 바뀌고 당장 입을 옷이 없으니 시간을 쪼개어 그 과정을 진행해야 한다. 어젯밤도 당장 너무 더운데 반바지 하나 나와 있는 것이 없어서 시작한,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이렇게 무언가를 하다 보면 짜증이 치밀고, 투덜거리고, 조바심이 나기 일쑤다. 또 옷을 정리하는 것은 옷을 사는 것만큼 재미있지 않다. 옷을 살 때의 열정만큼 가진 옷들을 잘 정리만 해도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을 텐데 싶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내 지도교수님의 당시 연구주제는 선불교의 Mindfulness였다. 한국어로 독특한 단어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마음씀' '마음을 다하기' '내 전존재를 지금 현재에 존재하기' 등으로 나는 이해를 한다. 아, 아마도 '유심 有心'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이 있음' 혹은 '마음을 들여다 봄' 정도로 해석됐던 것 같은데.... 오래전 교수님의 공부를 함께한 것뿐이라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마음을 다해' 매사에 깊이 존재하는 것은 비단 선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많이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에니어그램으로 유명한 리처드 로어(Richard Rohr)나 대중에도 잘 알려진 헨리 나우웬 (Henry Nouwen)이 그렇다. 신을 경험하는 것은 현실에 내 마음을 다해 깊이 존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우리는 결국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옷들을 꺼내고 정리하고 넣는 이 모든 -귀찮은- 과정에서도 나는 mindful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짜증이 올라오고, 더워서 지치고, 옷장이 컸으면 이런 수고를 안 했어도 되는 것에 대한 한탄이 일 년에 두 번씩 꼭 올라온다. (즉 할 때마다 올라온다는 뜻) 지금의 자리에서 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모든 한계가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의 움직임 또한 느끼고, 이것 또한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흡수시키는 것이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나는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얼마나 부산했는지. 오랜만에 저녁 모임이 취소가 되어 남는 시간에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수채화 도구를 바리바리 싸들고 거실에 나와서 수국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던 중 입고 있던 바지가 너무 더운데 반바지 하나 나와 있는 게 없어서 그리던 그림을 내팽개치고 여름옷을 꺼내기 시작하고, 또 그러다 보니 여름옷이 갈 곳이 없어 옷장에 있던 겨울옷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빨래를 돌리고, 빨래를 돌리다 보니 집안의 눅눅한 기운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와중에 스팀청소기를 돌렸다. 그러다 말고 다시 수채화로 돌아가서 수국을 완성시켰는데, 마음이 그곳에 있지 않으니 수국의 색이 일정하지 않고 붓질도, 색의 조합도 어느 하나 맞지 않는 조악한 그림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밤 열한 시다. 옷장 정리를 마무리한 게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대체 뭘 한 건가 싶다. 자러 침대에 들어서도 한참을 번쩍거리는 플래싱 같은 이미지들이 튀어나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내 존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음을, 마음과 영혼이 차분하지 못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 전 드리는 기도도 흩어지고, 다가오는 오늘에 대한 두려움도 잠을 방해했다. 내가 mindful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오늘부터 소용돌이가 시작될 예정이다. 소용돌이가 얼마나 커질 것인지, 소용이 될 만큼 커져야 하는데, 너무 커져서도 안되고, 혹은 너무 작아서도 안된다. 아주 적절한 크기의 소용돌이가 시작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적당히 흔들어 아주 좋은 지점에 착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너무 커져서 사람들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공포를 일으켜서도 안되고, 혹은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아주 적당한 사이즈의 소용돌이라서 사람들이 오히려 이 소용돌이를 이겨보겠노라고 결연하게 두 발로 땅을 딛고 스스로 일어서게 만들어야 하는, 그런 소용돌이여야 한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내가 잘 돌파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인 생초짜인데, 내가 이 소용돌이와, 그 공포와, 그 부르심과, 그 용기와, 이 모든 것들을 잘 돌보고 돌파할 힘을 갖도록, 내가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이 나를 얼마나 겁먹게 하는지. 지금도 쓰면서 눈물부터 나는구만. 도망가고 싶다. 가능하다면 도망가고 싶다. 어 이거 쓰면서 어디서 들어봤는데? 하니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드린 기도였다. 아, 이런 기분이셨겠구나. 아....


지난 일 년 동안 내가 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힘이 되기를. 나와 그들 모두에게. 그러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하나님의 존재 안에 완전히 mindfully 거하면, 나는 이 모든 두려움 또한 '바라보고' 기꺼이 안아들이며, 또한 한걸음을 평화롭게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떼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두려움의 장막은 사실 뜨는 해에 쉽게 사라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고, 나는 또 그다음 한 걸음을 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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