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is one of those days.
내 직업은 목사다. 더 이상 목사를 직업으로 보지 않고 삶으로 보기에, 직업란에 목사라고 쓰는 것은 아직도 참 어색하다. 목사는 참 좋은 삶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지만, 눈물 나게 보람찬 순간들도 있다.
미국 교회는 예배 중간에 "children's message"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교회 제단 앞에 둘러 앉히고 선생님이나 목사가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짧은 메시지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오늘 칠드런스 메시지 시간에 평소보다 더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둘러앉았다. 올해 9월이면 두 돌이 되는 조비가 아빠 손을 붙잡고 뒤뚱거리고 나와서 오늘 메시지를 전하는 자기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짧은 이야기를 듣고, 오늘 여섯 살 생일을 맞은 터커는 내가 준 생일선물을 손에 꼭 쥐고 제단 계단에 앉아있다. 공룡을 좋아하는 그레이슨은 끊임없이 선생님의 말을 잘라먹으며 공룡을 설명하고, 조금 큰 아이들은 옆에서 이런 작은 아이들을 돌보며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들의 웃음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파안대소를 나누고, 아이들의 엉뚱한 행동에 파스락거리듯 웃음이 또 한 번 피어오른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할머니 품에 안겨서 뒤를 돌아보던 조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로 답례를 한다. 태어난 아이를 안고 세례를 주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눈을 맞추면 웃음을 답을 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시간보다 빠르게 자라는 아이들. 그러나 부모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저 허탈하게 웃겠지. 시간의 상대성 이론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닐까 싶다. 남들에게는 빨리 가는 그 시간이 아이 부모에게는 아이가 자지 않고 떼를 부리는 새벽 두시의 십 분보다도 더 느리게 간다. 같은 시간이지만 느끼는 시간의 양은 천양지차다.
인생의 봄 같은 아이들. 봄비를 한껏 머금은 기름진 옥토에 방금 머리를 내민 싱싱하고 푸르른 새싹 같은 아이들. 아이들의 웃음은 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게 매혹적이고, 아이들은 마치 천년을 살 메타세콰이어의 어린 묘목처럼 기세 좋게, 마치 끝을 모르는 것처럼 자라난다. 삶이 항상 너희에게 그렇게 인자하기를. 세상이 항상 너희에게 자비롭게 웃어주기를. 나는 기도한단다.
오전 예배를 마친 후 나는 점심도 거르고 바로 가까운 옆동네의 종합 병원에 달려갔다. 일주일 전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할머니도 어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가하게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직 할아버지도 퇴원하지 않은 상태인데 할머니마저 바로 옆 병실에 입원을 한 것이다.
이렇게... 가끔 할 말을 잃게 하는 일들이 생긴다. 물론 더 기가 막히는 일들도 왕왕 생기지만, 나이 든 분들에게 생기는 일들의 경우 더욱 절박하고 곤란한 일들이곤 해서 나이 드신 분들의 곤란을 곁에서 보고 있자면, 마치 수채 구멍을 막아놓았던 스탑퍼를 빼고 빠지는 물을 들여다보듯 내 마음의 무엇인가가 마구 빠져나간다.
할머니의 병실에 들어서자 마치 무거운 기름을 먹은 장막을 드리운 듯 절망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누른다. 휠체어를 타고 할머니 곁에 계신 할아버지는 고통에 할 말을 잊으셨고,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거야"를 반복하시는 할머니의 어깨에는 천근 같은 짐들이 발악하듯 매여있다. 이곳에 하나님의 친구로서, 두 분의 친구로서 존재하는 목사는 마치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 제사장의 심정이 된다. 내가 무슨 슈퍼히어로 같은 엘리야(성경에 나오는 슈퍼히어로 같은 예언자)도 아니고 내 기도에 오랜 가뭄에 조각만한 구름이 떠올라 모든 가뭄을 해소해줄 비가 올 리도 없는데. 그러나 나는 내 작은 기도에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 이 힘든 시절에 단비 같은 작은 비라도 내리기를, 혹은 작열하는 자비 없는 태양을 피할 아주 작은 구름이라도 나타나기를, 이 두 분의 지치고 느린 여정에 한 모금 생수 같은 해갈이 있기를, 애타게 바라게 된다.
190이 넘는 장신인 할아버지의 옛 사진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생긴 미남이 오만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죽하면 할아버지의 옛 사진을 본 내 첫마디가 "와 잘생기셨었네요!"였다. 할아버지가 매우 만족한 미소를 보이셨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키 큰 미남이 어느샌가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는, 더 이상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위험한 수준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양로원으로 밀려가야 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계신 양로원은 한 달에 6천 불-한화로는 아마도 6백만 원-이 든다. 할아버지의 직업은 교사였고, 할머니의 직업은 병원 행정직원이었다. 둘 다 은퇴연금과 펜션, 건강보험이 좋은 직업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아내 앨버타는 "은행통장이 녹아들어 간다"라고 표현하셨다. 양로원에서의 일 년이 두 분의 재정을 바닥내고 있다. 할아버지 존을 극진히 사랑하는 앨버타는 자신이 장차 써야 할 양로원 비용은 생각지도 않은 채 모든 돈을 쏟아부어 존을 좋은 양로원에서 좋은 치료를 받게 한다.
나이 드는 것은 재밌지 않은 과정이다. 나이가 들어가지만 아직 살짝 억지를 부리면 여전히 젊은 축에 끼는 내가 불평하는 "무릎에서 소리가 나"와 휠체어를 밀기 위해 오래전에 근육이 사라진 두 팔을 사력을 다해 휘저어야 하는 팔십 대 노인의 "팔꿈치에서 소리가 나"는 같은 이야기일 수가 없다.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고, 아마도 가장 풍채 좋은 시절보다 30퍼센트는 모든 것이 줄어들었을, 너무 작은 두 노인의 깊은 절망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 절망 하나 더 보태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것이 전쟁일 그들의 하루에 던져진 그 절망의 크기가 너무 커서, 그곳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 무기력함에 다시 한번 몸서리를 친다.
아무 할 말이 없는 나는 앨버타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침대 위의 앨버타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눈다. 조용히 흐르는 앨버타의 눈물에, 주책스럽게 함께 흐르려는 내 눈물을 간신히 감추었다. 나마저 울면 내게서 희망을 보아야 하는 그녀의 마음에 절망을 하나 더 얹혀줄까 봐 두려웠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데, 삶을 계속되게 하는 전제조건들이 하나둘씩 기약없이 사라져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목숨은 이 곳에 있을 때,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내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내 모든 감각과, 나를 지탱해주는 내 모든 가족이 떠나간 후에도 아침에 내 생명이 여전히 내가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침대 위에 묶여서 가느다란 실처럼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나는 누구란 말인가?
유발 하라리는 사실 이제는 죽음도 이론적으로는 정복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는 충격적이고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그 예로 불치병이 완치될 때를 대비해 미리 자신의 몸을 초저온 상태로 냉동시켜 놓고 '다시 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몇몇 미국 부호들이 자신들의 신체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가입해서 자신의 신체장기가 고장나서 더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 그 장기만을 '대체'해서 아무 문제없이 계속 살 수 있기를 꿈꾸는 것을 든다. 이렇게 사는 경우 이론적으로 350살 이상 살 수 있단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이 영원과 같이 지속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미인가? '영원'을 넘보는 우리의 세상에는 더이상 신이 존재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 (인간을 뜻하는 '호모'와 신을 뜻하는 '데우스'), 신인간이 곧 현인류를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호모사피엔스가 현재의 지구를 차지한 것처럼. 그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삶인가?
어쨌든 더 이상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쉽지 않을 때가 온다는 것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메시지인 것 같다. 그래서 '현재를 즐기라'는 잠언의 이야기가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조언, 가장 유대인들이 줄 수 있을 것 같은 조언이지 않을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내일은 하나님의 영역에 밀어두고, 나는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겠다. 이를 악물고 오늘을 즐기겠다는 다짐. Carpe 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