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여행 에세이 제목이지만.
오늘 아침 느낌이 딱 그렇다. 가만히 거니는 느낌. 마치 내 어깨에 새겨 넣은 wander를 실천하는 날이랄까. 분주한 한 주를 마치고 오늘 아침 스케줄 되어있던 미술 클래스가 취소되어 생긴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 늘어지게 잠을 자는 걸로 채웠을 시간이지만 아침 8시에 미팅이 있었던 바람에 오전 8시 짧은 미팅을 마치고 간단한 일들을 한 후 바로 스타벅스로 직행했다. 내가 사는 작은 마을 옆 조금 더 큰 마을에 얼마 전에 스타벅스가 들어왔다. 시골에 스타벅스라니. 스타벅스 커피에 길들여진 입맛인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이렇게 와서 오전을 보낸다.
오늘은 날이 흐리고 바람이 차다. 옷장에서 올해는 한 번도 입지 못했던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고 회색과 톤다운된 분홍 컬러가 블렌드 된 스카프를 두르고 분홍 스웨이드 운동화를 신고 책가방에 컴퓨터를 넣고 읽어야 하는 책을 한 아름 들고 왔다. 옷차림 설명이 긴 걸 보니 내 옷차림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커피숍에 앉아서 읽어야 하는 책은 하나도 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 글과, 그림과, 사진들을 읽고 마음을 읽는다. 유튜브를 스트리밍 해서 듣는 한국 인디 밴드의 음악의 소프트한 기타 반주와 목소리가 구름 낀 오늘과 딱 알맞은 볼륨으로 서로의 존재를 조율하며 마치 방금 내린 커피 향 같은 맛을 선사한다.
남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먼 거리에 있는 그와는 이렇게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다. 작게 목소리를 낮춰 통화하는 그의 목소리가 달콤하다. 장난꾸러기지만 이럴 때의 그의 목소리는 한결 가드를 낮추고 나도 이렇게 달콤할 수 있다는 듯한 기세로 이야기를 건넨다. 내가 그런 목소리를 좋아한다는 걸 그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런 우울한 아침에 달콤한 그의 목소리는 지금 마시는 커피의 쌉싸름함에 설탕 같은 달콤함을 더한다.
멀리 있는 사람과의 연애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를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 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계속 멀어져 지금은 두 달에 한번밖에 만나지 못한다. 그래도 다행히 이 먼 거리 이전에 가까이 있었던 시간들의 존재가 서로에게 더없는 완충제 역할을 해주어서 우리는 지금으로 행복하다. 그만큼 함께할 때의 시간은 더욱 도드라지게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짧지만 천국 같은 데이트. 한 손으로는 운전을 하고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그의 손. 단단한 그의 손을 잡은 내 마음은 철없이 편안해져서 마치 세상 어느 곳에 내려놓아도 이 손만 잡고 있다면 나는 천국 어딘가로 통하는 계단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다는 듯 평화롭다. 내가 이토록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항상 열심히 배우듯 그를 사랑하지만 항상 그의 사랑이 내 사랑보다 더 큰 듯하다. 그를 통해 나는 연애를 배운다. 사랑을 배운다. 고마움도 조금 묻혀서 함께 배운다.
오래 연애를 했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것에 종종 질문을 듣는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때가 되면 하겠죠." 연애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는 누군가를 소개해줄까도 묻는다. 굳이 모든 사람이 내 '상태'를 알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의해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에 아주 가까운 몇몇만이 알고 있다. 그 질문에도 내 대답은 똑같다. "때가 되면 만나겠죠." '때'는 내가 알겠지.
소위 결혼 적령기라는 나이가 있다. 사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 기준으로도, 사생활을 묻지 않는 미국 기준으로도 한참 지났다. 그리고 그 나이를 지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 그 '알맞은 나이'에 만나던 친구와는 '알맞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결혼이란 걸 할 뻔했었다. 좋은 친구였지만 지금 돌아보니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했더라면 내 세상은 하마터면 그 친구로 제한되고, 나는 그 친구를 제한할 뻔하지 않았을까.
지금 남자 친구와도 "우리가 결혼하면...."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하곤 한다. 그 날은 와봐야 알겠지만. 하나 둘 다 동의한 것은 꼭 방은 따로 쓰자였다. "매일 결국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한이 있더라도 방은 따로 갖자 우리." "그래, 우리 꼭 그러자. 각자에게 공간은 꼭 필요해." 그래, 우리 서로에게 공간을 주는 사랑을 하도록 하자.
나이들어 하는 연애란 이런 맛이 있다. 스무살에 이런 이야기를 상대가 꺼냈다면 나는 베갯잎을 밤새 적시며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 "쟤가 나 나 별로 안좋아하나봐...." 어떻게! 사랑한다면서 각자 있자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지? 그럼 친구들은 이렇게 보태겠지. "진짜 나쁜 남자다. 야, 헤어져." 우리는 종종 관계의 답을 관계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질문의 객관식에서 찾으려고 한다. 모든 답에 정형화된 답은 없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객관적' 기준이라는 틀에 우리의 관계를 구겨넣으려고 한다.
사르트르와 보바르는 계약결혼관계였다. 그러나 둘은 평생 사랑했다. 폴리가미(polygamy)를 실천했던 삶으로, 다자적 연애관계라는 아주 현대적인 개념을 거의 백년전에 실천했던 커플이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아 같은 사람들이었달까. 참고로 나는 "아내가 결혼했다"를 한 다섯 번은 읽었다. 영화보다 소설이 훨씬 좋다. 축구팬이라면 더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주인공의 아내인, 두 번 결혼한 그녀, 인아를 참 좋아한다. 남성작가 쓴 글인데, 내 젠더관념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 작가이기도 하다. 폴리가미에 대한 한국의 보수적, 혹은 평범한 남성이 바라보는 시각이라니...? 애초에 폴리가미로 글을 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센세이셔널했다. 한번 만나보고 싶은 작가님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름이 또 기억나질 않는다.
보통 폴리가미는 매우 섹슈얼하게 읽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의 인아는 두 남편을 동시에 온 힘을 다해 사랑한다. 둘에게 헌신적이고, 그녀의 사랑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매우 바쁘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지 섹슈얼한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사랑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고할까. 소설에서 인아와 두 남편은 차츰 서로를 이해하며 '셋'과 아이 하나, '넷'으로 이루어진 가정에 대한 그림을 함께 그리기 시작한다.
왜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wandering off를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그 나이대에 실현되어야할 명제들을 실현하지 않은 채 지나가다보니 객관식 답이 가지지 않은 다른 답들도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한다면 상대의 공간을 더욱 존중해야 한다는 가장 간단한 답을 우리는 종종 틀린다. 연애 관계에서만이 아닌 우리 삶에 기초한 모든 관계에서 말이다.
지금 남자친구 이전에 나는 연애를 길게 해 본 적이 없다. 가장 긴 연애가 2년 남짓. 그마저도 그 사람은 미국에, 나는 한국에 있는 시간이 절반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에 빠진 후 나온다는 호르몬의 유효기간 3년이 넘는 사랑을 해본 적이 기본적으로 없다. 그래서 그 기간을 넘어선 연애는 지금 이 사람이 처음이다. 그리고 아마 그것도 서로 멀리 있는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한다. 또한 그도 나도 혼자 있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 자신의 공간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만큼 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사랑호르몬의 파워가 내 뇌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도 나는 어째서인지 이 사랑에 tuned in했고,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하늘의 구름이 분홍색 솜사탕처럼 보이는 기적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는 지금도, 나는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생각하며 함께 웃을 수 있다.
Simply, quietly wandering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