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세상의 틈 사이에서 사는 사람의 딜레마

by 솦 솦
25896672620_be8ac82edd_b.jpg

다른 나라에 살지만 한국말을 쓴다.

다른 나라에 살지만 무한도전을 애정한다.

다른 나라에 살지만 한국음식을 해 먹고, 한국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내 정체성이 속한 나라와 내가 사는 나라의 불일치가 가져오는 불협화음-

미국은 영원히 내 조국이지 않으리라는 느낌.

한국은 영원히 내 조국이리라는 애정.

그러나 나는 이제 영원히 한국, 혹은 한국을 상징하는 그 어떤 것들에 다시는 나를 동일시하지 않으리라는 깨달음.

미국의 가치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의 역사에서 나의 어떤 부분을 찾아내면서 겪게 되는 자기 동일화의 과정.


버락 오바마를 사랑하고,

문재인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버락 오바마는 내 완벽한 대통령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문재인도 내 완벽한 대통령일 수가 없다.




'중간(in-between)'을 사는 사람들.


내가 나를 '나'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떠한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다. 나고 자란 문화, 혹은 새롭게 수여된 문화, 관계, 정치, 철학, 이 모든 것들이 섬세한 망처럼 촘촘하게 짜여 나로 하여금 '나'를 정의하게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고, 매 순간 일어나야 하는 작업이다.

'나'는 내가 매일 겪는 일련의 사건들과, 감정들, 사고와 관계 이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끊임없이 나를 재생성하기 때문이다. 십 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판이하게 다르며, 오늘의 나와, 십 년 후의 나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다를 것이다. 과학적으로 인간은 2개월에 한 번씩 모든 세포가 재생된다고 한다. 온 우주의 입자들(particles)은 이렇게 재생되는 조직으로 이루어진단다. 2개월에 한 번씩 말끔하게 재생되는 '나'. 그러므로 나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나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간을 사는 것의 딜레마 (the dilemma of living in between)'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자면, 14세 이후에 두 번째 언어를 배운 사람의 뇌는 14세 이전의 두 개, 세 개의 언어를 배운 뇌와는 달리 언어 별로 뇌를 분화하지 못한다. 14세 이전에 여러 언어를 배우면 언어를 담당하는 뇌의 부분이 해당 언어에 따라 각기 분화한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그렇게 어린아이들이 어릴 때 영어나 다른 외국어를 접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가보다. 옳다 그르다는 부모가 아니므로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나처럼 14세 이후에 두 번째 언어를 배운 사람의 뇌는 한 영역에서 두 언어를 다루게 되는데, 뇌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은 제한이 있으므로, 결국 두 언어는 뇌의 그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물론 과학자들은 격렬한 싸움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지만 내 경험 상 두 언어의 싸움은 매우 격렬하고 지난하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대학원으로 바로 들어왔다. 영어로 문화, 역사, 문학, 심리와 정치를 배워본 적이 없는 내가 뛰어넘기에는 부담스러운 도약이었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고, 졸업도 했고, 이제는 이곳에서 일을 한다. 최근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일을 하면서 영어로 사는 비중이 크게 늘면서 한국어가 놀랄 정도로 약해졌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drastically, dreadfully weakned.

아주 간단한 표현을 잊고, 일기를 쓰려고 펜을 들면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의 남발이 늘고, '우아하거나 섬세한' 표현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영어가 놀랍게 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끔찍할 정도로 그렇지 못했다. 한국어에 문예체, 구어체, 학문적인 어체 등등 상황에 다르게 쓰이는 표현과 어휘들이 있듯이 영어도 그런데, 어릴 적에 습득하지 못한 것들을 이제 와 마구잡이로 습득하니 여전히 내 영어의 세계는 혼돈 그 자체이다. '흉내내기(mimicking)'에 그친다고 할까. 제대로 흉내나 내면 다행이게. 여전히 끔찍하게 알맞지 않은 상황에 알맞지 않은 언어나 표현을 쓰곤 한다. 나중에 깨닫고는 얼굴이 화끈거리기 일쑤이다.


어쨌든 한국어를 잊는다는 공포심에 한국어로 작년 언젠가부터 한국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영어를 반을 섞고, 매우 얕은,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어휘를 사용했다. 일 년 여가 지난 지금 내가 느끼기에 내 한국어 글쓰기는 정말 많이 좋아졌다. 예전처럼 마음에 드는(내 기준에) 언어와 표현, 구조를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정말 많이 나아졌다. 물론 지금도 며칠을 쉬면 한국어로 무언가를 표현하는데 당장 답답함과 막막함을 느낀다.


한국어에 시간과 마음을 쓰면서 내가 느끼는 점은, 한국어가 느는 만큼 영어가 준다.... 아주 미세한 차이라지만, 쓰지 않는 만큼, 시간을 타 언어에 빼앗기는 만큼 그 언어는 죽어간다. 일상생활에는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라지만 어떠한 독특한 형용사들, 의미의 간결을 잡아내는 동사들, 문장에 우아함을 더해줄 그 결정적인 한 단어를 찾아내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아예 못 잡아내거나 촌스럽게 쓰게 된다.


영어로 소설을 읽으면 항상 새롭다. 평소 잘 쓰이지 않은 문예체의 단어들의 향연에 나는 넋을 잃고 그 향기에 빠진다. 그 단어들이 내 것이지 않다는 시샘에 사로잡혀 책을 읽다 말고 뜻을 찾아보고 단어를 입으로 몇 번씩 되뇐다. 입 안에서 피어오르는 그 단어만의 독특한 식감과 맛에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게 되곤 한다.

신학이나 철학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념적인 책들은 의도적으로 한국어보다는 영어로 읽기를 선택하는데 영어 문장 구조가 개념을 형상화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단어들의 담백한 나열, 오해를 허락할 여지가 없는 정확한 구조가 관념을 설명할 때의 영어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한국어로 철학이나 신학 책을 읽으면 대개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에서 번역되다 보니 관념을 풀어쓰며 의미는 희미해지고 영어로 읽으면 아무것도 아닌 관념이 훨씬 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 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내 느낌은 그렇다. 3대 포스트 콜러니얼리즘 학자 중 하나인 (악마의) 가야트리 스피박의 책을 영어로 읽다가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아 한국어 번역판을 어렵게 구해 읽었다가 책을 화형 시킬 뻔했었다. 번역자가 스피박을 제대로 이해하고 책을 쓴 게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물론 스피박은 영어 네이티브가 영어로 읽어도 욕이 나오는 텍스트이기는 하다만. 그러나 그런 그녀는 컬럼비아대 영문학 교수이다. 난 천재들이 진짜 싫다.) 어느 언어학자가 한국어는 관념적인 사고가 매우 어려운 언어 중 하나라고 말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난다. 언어적으로는 매우 아름다우나 관념을 형상화하기가 어렵댔나.. 뭐 그랬다.

어째 쓰다 보니 영어의 장점을 쓰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 전혀 아니다. 여전히 내게는 어려운 제2외국어이기에, 영어로 책을 읽거나 쓰는 것은 더 많은 인내와 시간을 요구하며, 나는 그렇게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한국어로도 어떠한 수준에 다다른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과,

영어로도 한국어만큼은 아니더라도, 미려하고 섬세한, 짜임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은 실제로 내 안에서 실제적 시간의 사용 측면에서 충돌한다. 당장 한 시간을 한국어로 글을 쓰면 영어가 사그라들고, 영어로 무언가를 쓰면 한국어가 확 줄어든다. 당장 나 자신이 두 언어의 줄다리기 중간에 서 있는 딱 중간지점임을 알려주는 색깔 있는 마크 같은 느낌이 든달까.


딱 색깔 있는 마크 같은 존재로 두 세상 사이에서 사는 것은,

결국은 두 세상 모두에 속하지 못한 것 같은 소외된 느낌을 선사한다.

결국 나는, 그리고 많은 어느 세상에도 속하지 못한 외지인들은 추운 저녁 화롯불이 따뜻이 방안을 밝히는 한 집의 저녁식사를 창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처럼 누군가의 소속감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본인이 깨닫든 그렇지 않든, 가지게 된다. 프린스턴대의 Sang Lee라는 한국계 미국인(정확히는 1세 이민자이므로 한국인이 맞다)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From a Liminal Space(경계 공간으로부터)"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경계 공간"에서 산다는 것. '나'를 경계 공간-아무에게도 속하지 못한 그 애매모호한 공간-에 속한 자로 정의한다는 것은, 물론 Lee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이 안에서 발견하지만 (Lee says the undefinable definition of the liminal space gives the unrestricted possibilities of defining myself in numerous new ways, 리는 어떤 정의도 없는 공간에 속했다는 의미는 곧 나 자신을 제한없이 정의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원하는 대로 아무 데나 갈 수 있지 않느냐는 말로 나는 해석한다), 매우 외로운 일이다. 가끔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들도 발견하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외로움에 아직도 익숙치 않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시카고 친구가 "나 한국사람 다됐다! 지하철 보증금 돌려받았다!"라고 쓴 걸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하철에 보증금이 있어? 한국에 가서 전철 환승을 이제 매우 한국사람스럽게 할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쓴 글이었다. 나보다 일찍 미국에 온 사람이라 그런 거에 매우 감동하고 있다. 쯧쯧.

그러나 지하철에 보증금이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한국은 변화에 드는 시간이 매우 짧다. 2,3년 간격으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모든 버스 노선이 바뀌어 있거나, 지폐 모양이 바뀌어 있거나(친구들이 커다란 옛날 만원짜리를 들고 온 내게 간첩이냐고 물었었다. 나쁜 것들), 전에 없던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항상 화려한 서울의 패션은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간 나를 항상 전철 안에서 가장 촌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놓곤 한다. 몇년 만에 만난 고모가 너는 좀 차려입고 다니라고 핀잔까지 할 정도였다. 나름 패션에 한 자부심하는 사람인데, 매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한국은 변화에 민감하고 재빠르다.

이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한국은 사실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는 나라이다. 당장 돌아갈 '고향집'이 없는 것은 여러가지로 불편함도 동반한다. 당장 올 가을에 한국엘 가더라도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기 보다는 맘 편히 교통이 편한 곳에 레지던시 호텔을 빌리거나 에어비앤비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할 생각이다. 친척은 애매한 이름의 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울을 그리워한다. 아마도 그 그리움의 많은 부분은 먹거리이고, 그리운 내 사람들의 얼굴들이다. 그리고 서울 그 자체도- 나는 그립다. 3년 전 찾아간 서울의 늦여름 하늘은 바라만 봐도 먹먹하게 눈물이 나는 그것이었다. 바쁘게 점심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는 회사원들 틈에서 햇살이 뜨거웠음에도 나는 광화문 거리에 한참을 앉아 하늘과 사람 구경을 했었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아?'라고 말을 걸며-


나는 아마 앞으로도 평생 이 "중간지대"를 살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상황이 변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라도, 나는 영원히 나를 a Korean fully belonged to Korea(완벽한 한국인)으로 정의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영원히 나를 아메리칸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한국어로 말하고 쓸 때 영어를 안타까워하고, 영어로 말하고 쓸 때 한국어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는 영원히 어중띠게 여기서 살겠지. 내가 속한 삶이고, 내가 택한 삶이다. 내가 처음 이 삶을 택할 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아마도 좀 더 신중했겠지.


But overall, I am very thankful for what I've got.

This in-betweenness has formed me to be who I am now. All the tag-along things such as a sense of inferiorness, of ansence, loneliness, racism, etc that I didn't know that was a package deal when I chose to live abroad have also formed me to be me whether it was good or not.

Cheers to those live in between! The sense of in-betweenness is not about where you are geographically or physically placed; it is rather about how you place yourself in your life or a culture where you are placed. We can choose to be who we are.

(그러나 대체적으로, 나는 내가 가진 것들에 매우 감사합니다.

'중간에서 사는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해외에서 사는 것을 선택할 때 열등감, 부재감, 외로움, 인종차별 같은 것들이 하나의 패키지 딜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그 모든 부수적인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요. 중간 지대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건배를! 중간에서의 삶이라는 건 아마도 지역적으로 혹은 실제로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당신이 당신의 삶, 혹은 당신이 속한 문화에서 어떻게 당신을 위치시키느냐입니다. 우리는 되고 싶은 자신을 선택할 수 있어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마존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