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기하지. 고향이란, 고국이란 이런 것일까.
보통 번역일을 할 때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다. 타깃 언어가 모국어인 경우가 훨씬 부드러운 번역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면 어색하기 짝이 없지. 아무래도.
오랜만에 짧은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지금 번역일에는 한국어 지명들이 많이 나온다. 한국어 표기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번역문은 한국어 표기를 로마자 변환을 따르다 보니 욕 나오게 어렵다. 한국 지명을 헤맬 줄이야. 이런 표기법은 누가 왜 발명했을까.
어쨌든 한려해상 국립공원이나 칠연 폭포, 하다못해 전라도와 경남에 있는 작은 면과 읍의 이름들이 즐비하게 나온다. 한 단어 한 단어를 번역하고 혹시 몰라서 포털에 교차검색으로 실제 존재하는 지명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며 번역을 하는데, 한 단어 한 단어를 입으로 되뇌며 스프레드시트에 적어 넣으며, 단어마다 맛이 피어오름을 느낀다.
'칠, 연, 폭, 포...'하면서 적어 넣으면 산자락 깊은 골에 위치한, 마치 선녀가 목욕을 하다 나무꾼을 만나 부끄러워하며 얼른 하늘 옷을 갖춰 입고 날아오르는 듯한 수줍은 폭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하고 적어 넣으면, 대학원 시절 학회 모임을 가장한 데이트에 설레어하며 한려해상 국립공원을 들렀던 일이 살포시 홍조를 띠며 솟아오른다. 그때 입고 갔던 소라색 면 원피스 생각도 함께 떠오르고, 차창을 열었을 때 들어오던 6월의 산뜻한 바람도 경쾌한 바닷가 냄새와 함께 내 기억 속으로 한번 더 불어 든다.
하다못해 작은 면사무소의 이름을 포털에서 검색해보면 관련 이미지와 한국 지도가 검색 결과에 함께 뜨는데, '아, 이 지역은 아마 쌀이 유명하지 않나?'하며 내 생각은 그 지역에서 재배될 맛있는 쌀과 평야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힌다. 갓 수확한 쌀로 방금 가마솥에서 지어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밥을 반찬 하나 없이 김치에만 먹어도 참 맛있겠구나, 하며 내 마음은 이내 여염집 여인이 갓 차려낸 소박한 나무상의 밥상머리에까지 달려간다. (덕분에 오랜만에 밥통을 꺼내서 밥을 지었다. 몇 달 만인 듯하다.)
참 지루하게 생긴 도산서원에 유독 붉은빛이 강렬해 전체 서원에 색을 입히는 아름다운 작약에 대한 기억이 내 십 대의 기억으로부터 어지럽게 살아나고, 시골 가던 길에 만난 이름 모를 강에서 잠깐 머물러 물놀이를 하던 한 여름날의 시원한 기억이 기억 너머 어딘가에서 한국의 시골은 이렇지, 하며 나를 가르치며 찾아든다.
'사북면'이라는 단어에서 피어오르는 탄광촌에 대한 이미지들, '사북'을 배경으로 했던 내 어린 시절의 어떤 드라마, 무언가 척박할 것 같은 느낌들. 사북을 실제로 가본 적이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기에 사실 사북이 어떤 지역 인지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미디어나 간접 경험을 통해 얻은 '사북'에 대한 이미지들이 내 안에서 사북이라는 단어를 만나면서 어지럽게 이곳저곳에서 튀어 오르고, 피어오른다.
나도 모르게 멍해지며 한참을 단어의 맛과 기억의 아지랑이를 좇는다. 마치 한껏 동여맨 아름다운 댕기 끈 맨 이를 좇아 한참 산을 쏘다닌 느낌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나는 그 향기로운 나라에서 가장 큰 바닷물을 건넌 낯선 땅에서 숨을 쉬고 있다.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진 온갖 향기들이 이내 그립다.
기억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내가 기억하는 내 경험들이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한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기억하는 것, 내가 선택해서 기억하는 것들이 바로 '나'를 구성한다는 이 뻔하지만 새삼 놀라운 사실.
한국을 간다면 그리운 이들을 만나서 추억여행을 하려고 했는데 이번 번역일을 하면서 보니 내가 의외로 한국의 아름다운 곳들을 많이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산에 있다는 석가를 조각한 바위에도 가보지 못했고 (이름이 있을 텐데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강원도에 있다는 '미인 폭포'도 가보지 못했다. (얼마나 아름답길래 미인 폭포라고 이름이 지어졌을까) 그리고 한국에 구룡 폭포가 최소 9개는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알게되었다. 얼마나 장관이길래 용이 날아오르는듯할까. 다시 가게 된다면 추억여행을 아무래도 관광과 함께해야 할 것 같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사찰, 아름다운 계곡, 산 골짜기 골짜기를 마음에 새기듯 돌아보아야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들이 그립다. 마치 내 영혼 어딘가에 고향을 향해 끌어당기는 자석이 있듯이, 한국의 산과 들, 바다과 강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