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by 솦 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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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간에서 관계를 본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 한 관계가 표방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거리의 심미적인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를 놓치는 거라고 (혼자서) 생각한다. 물론 남한테 이런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할 만큼 뻔뻔하지는 못하다.

아마도 이런 내 관점은 내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일 텐데, 내성적인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보다 글이 더욱 좋은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느끼고, 서로의 사이에 아주 이상적이다 싶은 거리가 있을 때, 마치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를 보듯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관계라고 느끼곤 한다.


내가 자연스럽게 설정하는, 설정한다는 말이 생각해보니 맞지 않다. '애초에 거기' 있었는데 내가 나중에 인지하는 그 공간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누군가와는 심장과 심장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야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완벽한 공간감이라고 느끼게 되고, 혹은 누군가와는 인간이 가장 편안하게 느낀다는 60cm라는 버블랩을 넘기지 않는 거리가 가장 미학적이고 심미적인 거리다. 그리고 아주 간혹은, 우주의 외계 행성만큼 멀리 도망가고 싶게 거리가 먼 사람도 존재한다.


그리고 가만 보니 이 공간은 유기적으로 살아있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때도 있고, 마치 노를 저어 배가 포구를 떠나듯 조용히 멀어질 때도 있다. 그러다 다시 포구에 돌아와 정박하는 배도 있고, 혹은 수평선 멀리 아주 사라져 버리는 배도 있다. 그러니 관계는, 관계 사이의 공간은 그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살아있는 존재라고 부를만하지 않을까.

나는 이런 관계의 역동적인 공간감이 관계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SNS는 그 관계의 거리감을 일률적으로 만드는 한계가 있다. 오래전 친구들과 다시 조우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새로 알게 되는 짜릿함이 SNS를 통해 생성되는 관계의 장점이라면,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어 소명해야 하는, 죽음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관계가 SNS로 인해 가사상태에 빠진 채, 혹은 교착상태(impasse)에 빠진 채 몇 년이고 지속되는 것은 SNS가 주는 역효과라고 생각한다.


관계도 공간이 필요하다. 식물을 처음 땅에 심으면 처음 두 주 정도는 하루 두 번씩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한단다. 그래야 뿌리가 빨리 자리를 잡고, 깊은 흙 속에 숨어있는 물들을 끌어올릴 힘을 낼 수 있단다. 그러나 그 후로 물은 다시 2-3일에 한 번씩 주어야 하고, 그것도 잎과 꽃의 상태를 보아가며 유기적으로 결정해야 한단다.

모든 식물을 모두 죽일 수 있는 슈퍼파워를 가진 나는 한 달 전에 사 온 꽃 화분도 또 죽였다. 2주 동안만 주어야 했던 많은 물을 아주 꾸준히 3주를 줘 결국 꽃을 익사시킨 것이란다. 잎이 노랗게 되면 흙에 수분이 너무 많다는 뜻이라는데, 꽃이 보내는 그 사인을 읽는 눈이 없었던 나는 광신도처럼 물을 하루 두 번씩 아주 듬뿍 주었다. 꽃이 말한 애정과 애정 사이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깡그리 무시했고, 그 결과 아름다운 꽃화분 하나를 또 한 번 죽였다.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화무십일홍. 무서운 불길이 일듯 타오르던 사랑도 연애가 삼, 사 년이 계속되면 사랑의 모양이 바뀐다.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이다. 공간이 필요하다고 내 방식으로 이야기했으나 상대는 내 언어를 읽는 눈이 없었고, 결국 우리 관계는 한쪽에서 붓는 물에 익사해 버린 거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상정한 우리 사이의 심미적 거리와, 내가 원한 거리가 달라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결국 그토록 달랐던 것이겠지. 모든 관계가 천천히 타다 재처럼 산화되어갈 공간을 주어야 한다. 다시 불길이 일려면 또 적당한 때에 바람과 다른 불쏘시개가 있겠지. 산화되어야 할 것을 산소마스크를 끼우고 살리는 것은, 그 관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어떤 무엇보다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그 '관계'의 그 한 때를 알기에 여전히 애도한다. 그 눈부신 우리의 한 때를 알기에, 이 관계의 이 속절없는 저버림이 애석하고, 아쉽고, 애잔하고, 슬프다. 언젠가 다시 이 다 꺼져버린, 재만 남은, 초라한 흔적뿐인 이 자리에 기적같이 새 불쏘시개가 찾아들고, 또 무엇인가 불쏘시개의 불을 연소시킬 새로운 재료가 나타나서 우리의 관계가 마치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불을 붙이듯 화르륵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렇게 서로에게 지치고, 나와 다른 상대를 피곤해하며 간신히 연명할 것이 아니라, 눈부신 상대의 그 웃음과, 우주를 담아도 부족할 것 같은 그 세계에 대한 나의 경의와 찬탄이, 다시 불일 듯 살아나, 예전처럼 밤새 이야기를 나눠도 여전히 이야기할 것이 남은 그 시절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아니, 그보다 더욱더 멀리 나아가, 마치 은하계 가장 먼 어느 공간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훌쩍 커버린 서로를 완전한 하나의 우주로 바라봐주고, 서로를 경외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 우주가 더욱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내 우주가 더 많은 색을 입히고, 더욱 깊어져서 그 어떤 우주를 만나도 매몰되거나 모양이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싸 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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