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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un 21. 2018

좋은 글

여러 수필을 접했지만 여태 내가 만나본 수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수필을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두 개의 수필을 고를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과, 다른 한 수필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우연히 읽은 수필이다.

하루키의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은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아마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이름일 것이다. 심지어 그의 수필집 중 하나는 이 수필의 이름을 따서 출간되었다.  왜인지 <드래곤볼>의 무천도사가 생각날 듯한 목소리로 자기 연필 이야기를 하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다.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먼저 접했고, 그 에세이들 중에서도 특별히 이 수필 때문에 하루키가 단박에 좋아져 버린 나로서는, 꼭 기억해야 할, 아주 매력적인 에세이이다. 약간 변태 같은 일본 뒷골목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무천도사 같은 하루키를 만나고 싶다면, 나는 이 에세이를 강력 추천한다.




다른 한 수필은 이름도 모르고, 내가 책을 사서 읽은 것도 아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고등학교 수능 문제집의 국어 영역 예시로 나왔던 수필이다. 한 번도 수능 문제집이나 시험에 반복해서 나온 적이 없는, 유명하지 않은, 수능이 집어낼 만큼 유명하지 않은 수필인 듯하다. 하고 많은 문제은행에서 어쩌다 운 없이 걸려 나온 '백업' 지문 중 하나였겠지. 문장에서 기품과 관록이 배어 나왔다. 공간과 감정, 색깔과 시간이 모두 느껴지는 듯한 글이었다. 어린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읽기에도 작가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만만치 않은 사람이구나, 하며 알 수 있을 정도로 깊음이 남달랐다. 

수필의 화자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한다. 산이 깊은 시골에 살던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장에서 송아지 한 마리를 사 오신다. 어린 소년은 송아지와 금세 친구가 된다. 송아지를 데리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보여주고, 나누어주고, 이야기해준다. 송아지는 오빠를 무조건 좋아하는 어린 여동생처럼, 짓궂은 장난을 쳐도 대인배처럼 용서해주는 의리 있는 친구처럼 소년과 함께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그 큰 눈으로 소년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둘은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송아지는 소년의 전부였다. 

어느 날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송아지가 사라졌다. 집 안팎을 샅샅이 뒤져도 송아지를 찾을 수가 없다. 소년은 애가 탔다. 길이라도 잃어버린 걸까, 누가 데려가버린 걸까, 누가 해라도 입히면 안 되는데.

그때 어디선가 방울 딸랑이는 소리가 들려 눈을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아버지가 송아리를 데리고 싸리문을 들어오신다. 그런데 송아지는 소년이 알던 그 송아지가 더 이상 아니다. 자상하던 송아지의 눈은 이제 인생 쓴 맛을 알아버린 슬픈 어른의 눈빛이었다. 아버지는 송아지를 산골짜기로 데려가 코뚜레를 뚫은 것이었다. 이제 송아지는 더 이상 소년의 송아지가 아니다.   


문제집의 지문에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친구를 잃은 어린 소년의 마음이 천둥이 울리듯 읽히고,  함께 이곳저곳을 누비는 소년과 송아지의 모습이, 마치 안개가 자욱이 낀 아침산을 그린 수묵화처럼 뭉근히 일어난다. 아버지를 따라가는, 코뚜레를 껴 피가 철철 흐르는, 어른이 되어버린 송아지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일어나는 안개 같은 체온과, 털에 맺힌 이슬이 보일 듯이 선명하다.  

언어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는 건 이런 의미일까. 어린 내 생각에도 이런 생각을 했었다. 소년과 송아지가 함께 보는 산과 들이 마치 내 눈 앞에 보이는 듯하고, 초여름 들녘의 들큼한 공기가 내 손등의 솜털을 곤두서게 하는 듯했다. 코뚜레를 낀 송아지의 피 냄새가 내 입 안에서 진동하고, 아버지의 우악스러운 아귀힘에 내 어깨가 붙잡힌 듯 고통스럽다.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일까, 어린 마음에도 전율하듯, 그 짧은 수필의 한 토막을 읽었다.  

마지막 싸리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 아버지와 송아지가 걸어온 그 울퉁불퉁한 산길은 마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던 집 바로 앞에 있던 야트막한 동산을 내려오던 그 길로 겹쳐 보여, 나는 마치 내 어릴 적 그 동산을 송아지가 지나친 것만 같았다. 


아,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일까, 했다.


그의 수필은, 마치 여름 홑겹 한복을 입은 성마른 백발의 노인이 퇴청 마루에 혼자 앉아 아무것 아니라는 듯 붓으로 훌훌 써내려 간 글 같았다. 훌훌 그리건만 붓 끝에서 마치 금세 날아오를 것 같은 봉황을 그려내는 그런 화공의 그림 같았다. 아,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이구나, 했다.





어릴 적 나는 촌스러운 데가 있어서 (지금도 여전히) 아날로그를 좋아하고, 한글을 좋아했다. 한참 동안을 번역서보다는 한국 작가가 쓴 글을 더 좋아했다. 언어의 맛이, 고추장 맛이 나는 글은 고추장 맛을 아는 이가 써야 한다는 뭐 그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치즈를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추장을 발라 놓으면 그게 무슨 맛이야? 그런 생각으로 한동안 해외 고전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공간을 그리는, 순간의 소리를 글로 잡아내는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마치 글을 통해 내가 그들의 공기를 함께 숨 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 순간을 격렬히 사랑했다. 그런 어린 내가 한동안 몇 번이고 반복했던 읽었던 글은 박경리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여성작가들을 더 좋아했다. 번역서이기는 하나 펄벅의 <대지>도 몇 번을 읽었던 책이다. 여성에 대한, 여성의 의해 쓰인 글을 좋아했다. 비슷한 이유로 한동안 공지영의 글들도 자주 읽었다. 아주 옛날에 발행된 책이지만 (재 발간된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딸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또 다른 많은 좋은 이유로, 매우 사랑했던 책이다. (역시 번역서)




지금의 나는 한국말로 한 문장을 끝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내 뇌는 격한 혼란 속에 문장 구조를 연결하는 모든 부품들을 끊임없이 잘못 꺼냈다 얼른 집어넣고 다른 부품을 다시 꺼내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리고 또 틀린다.) 이 끝없는 혼란을 이기고 수려한 표현을 찾아내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글이 매우 진부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변명을 하는 중) 





좋은 글이란, 깊은 뒷마당에 길어지는 그림자가 마음 깊이 시린 것임을 알려주는 때이고,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한 줄의 표현도 없이 내가 함께 느낄 때인 것 같다.


쪽머리를 단정히 맨 모시적삼 차림의 어머니 뒷모습을 마치 내가 본 듯 가슴이 시릴 때,

우리는 그 글이 좋은 글이라고 하는 듯하다.


닫힌 중문 사이로 비치는 불빛과 어지럽게 오가는 그림자를 마치 머리를 빡빡 민 어린 중학생인 내가 바라보고 있는 듯할 때, 그렇게 막막함을 느낄 때, 우리는 그런 글을 좋은 글이라고 하는 듯하다.


아,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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