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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ul 09. 2018

Falling Upward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


놀랍게도 검색을 해보니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있다. "The Road Back to Me"라는 에니어그램 관련 책을 읽다 그 책에서 추천해준 책인 데다, 저자가 리처드 로어- 내가 좋아하기도 하는 신부님-라서 아마존으로 구입했다. 

칼 융의 이론을 따라 인생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서 전반기는 정체성을 결정하는 시기로 보고, 후반기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종류의 실패를 경험할 때 시작된다고 본다.  이 인생의 후반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두 요소로 로어는 첫째는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당신이 그렇게 느낄 때조차도."를 아는 것이고, 둘째로는 "We grow spiritually much more by doing it wrong than by doing it right."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패가 성장의 필수요소임은 비단 칼 융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는 알 수 있다. 부활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죽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이 실패는, 그러나 반드시 우리를 성장으로 이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성장하기를 거부하고 실패와 상처에 머무르기를 선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 후반전을 시작할 수 없고, 인생 전반전의 연장전에서 타임아웃을 외친 채 필드에 주저앉아 실패를 곱씹으며 곪은 상처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게 될 뿐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실패를 환영하고 겸허히 인생의 두 번째 단계를 살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더 깊은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It will sound an awful lot like the voices of risk, of trust, of surrender, of soul, of 'common sense,' of destiny, of love, of an intimate stranger, of your deepest self." 하나님의 더 깊은 목소리는 위험의 목소리, 신뢰의 목소리, 순종의 목소리, 영혼의 목소리, "상식"의 목소리, 운명의 목소리, 사랑의 목소리, 친밀한 낯선 자의 목소리, 너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다. 이 목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낯설어했던 것들을 가까이하게 된다. 전혀 읽지 않던 시를 읽게 되기도 하고, 신비주의가들의 책들을 읽기 시작하기도 한다. 이전에는 참 낯설었던 "낯선이"가 친밀하게 느껴진다 (친밀한 낯선 자).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며, 점차 우리는 세상이 정의하는 성공과 정체성이 아닌,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정의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로어는 우리 세상은 '성공'에 집착하고, 우리의 정체성은 사회가 그리는 정체성에 우리를 동화시키려는, 인생 전반기의 정체성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많은 교회들도 인생 전반기의 정체성에 머물러있다는 것이다. 성공과 엄격한 율법, 좁은 자아로 교회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세상의 관점을 닮아있다. 




실패라는 단어만큼 우리에게 두려운 단어가 있을까? 인생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했을 때, 그것을 '성장'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이가 과연 많을까. 나는 여태까지의 삶에서 천지가 뒤집힐만한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포스트 융 학자들은 '성장'에 '실패'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요소라는 데에 의의를 제기한다. 과연 주목할만한 실패가 없이도 스스로 인생의 한 지점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성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인생의 전반기와 후반기는 일직선 상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삶의 여러 단계에서 우리가 오락가락 오가며 경험할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삶의 변환은 일률적이고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모든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혹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목소리를 "친밀한 낯선 이(the intimate stranger)"라고 표현한 로어의 표현이 인상 깊다. 다른 누군가가 먼저 쓴 표현을 로어가 차용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내게는 생소하고, 동시에 인상 깊은 표현이다. 나와 항상 함께하지만, 내게는 그토록 낯선 이. 





내년이면 사십이다. (꺄악끄아악)

스물다섯에 꺾어지면 오십이라며 생일케잌을 앞에 두고 친구들에게 비명을 질렀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한데, 이젠 굳이 꺾지 않아도 금방 거기까지 다다를 나이가 되었다. 이야, 많이 컸고, 늙었구나.


늙어감이 '자라감'과 동의어가 되었으면 좋겠다. 

늙어가는 만큼 자라기를. 


성 이그네이셔스는 (이그나티우스?)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나중에 죽은 후 천국문을 지키는 베드로 사도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뒤돌아서 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아, 진짜 후회된다...!"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결정하라고 했단다. 

해서 미친 듯이 후회될 듯하면 하지말고,

안해서 미친 듯이 후회될 듯하면 저지르라는 뜻이다.(라고 적어도 나는 이해했다.)


마흔이 되는 내가, 

지금 내 삶을 어떤 종류의 '완전함'으로 이해하는 내가,

내 인생에서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어떤 삶을 내 인생의 후반기에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그 친밀한 낯선 이의 더 깊은 목소리를

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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