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돕는 사람 이야기

by 솦 솦
나는 죽음을 돕는 사람입니다.


나는 죽음을 돕는 사람입니다. 몇 년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누워계신 분의 안색만 봐도 죽음의 사신이 어디쯤 왔는지 대강은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라는 수식어는 괜한 것이 아니더군요.

처음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방 안에 들어서는 것조차 어색하고 무서웠습니다. 죽음의 사신이 날 발견하면 어쩌지...? 죽음의 그림자에 나도 빨려 들어가면 어쩌지...? 하는 공포가 선뜻선뜻하게 제 뒷목을 잡아서 병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머뭇머뭇하며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달까요. 일견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죽음을 처음 겪는 나 같은 사람에 죽음은 마치 블랙홀과 같이 엄청난 중력을 뿜어내더라고요.



그토록 무섭고 적막했던 죽음의 그림자를,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마치 의사처럼 알아봅니다. 다만 의사들이 수치로 파악하는 죽음의 질서를, 저는 그저 눈으로 대강 알아본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까지 보이던 생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나와 지금 함께 이곳에 있지만 이미 그는 죽음의 강 스틱스를 반쯤 건너기 시작한 것만 같습니다. 나와 함께 이 곳에 있지만, 이미 이 곳에 있지 않은 느낌이랄까요.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눈은 이미 피안(彼岸)의 세계 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달까요.


더 이상 그가, 혹은 그녀가 나와 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을 즈음, 의사도 죽음을 대비하는 처치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심장이 더 이상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한없이 낮아지는 혈중 산소 포화도를 높이기 위해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각각의 장기들이 폐쇄 과정을 진행시킬 때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과 같은 약품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모르핀의 도움으로 죽음의 마지막 단계의 필연적인 고통은 조절가능한 수준으로 낮아지게 된다고 합니다. 모르핀 없는 죽음의 고통은 조절 가능한 수위를 넘어섰다는 반어적인 표현일지도요. 모르핀의 별명이 '신의 도움'이라고 합니다. 가늠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망각하게 해주는 신의 도움이요. 모르핀은 부작용도 어마어마한 약품이지만, 이미 삶이 며칠 남지 않은 몸에 부작용보다는 고통을 진화(鎭火)하는 장점이 훨씬 크겠지요.

그러나 그리스 신화의 잠의 신인 모르페우스의 이름에서 이름을 따온 것처럼, 모르핀을 맞은 사람들은 잠에 빠져듭니다.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고통은 모르핀의 도움으로 재울 수 있지만, 인간의 정신도 함께 잠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과 적절한 안녕을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모르핀을 투여받은 이들은 스틱스와 이승의 어딘가에서 그들의 마지막을 헤매게 됩니다. 나와 함께 있으나, 함께 있지 않은 자들. 제 역할은 이제 이 곳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울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과, 그들의 가족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울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한 번은 몇 년을 친할머니처럼 마음으로 따르던 분을 갑작스럽게 보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인(死因)은 심장마비. 일요일 저녁 조용히 혼자 거실에서 기도하던 할머니는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기도하기 위해 읽던 기도 책에 머리를 댄 채 돌아가셨습니다. 나와 할머니는 그 일요일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요 며칠 몸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며 농담하듯이 불평하는 할머니와 말씀을 나누며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그 날 저녁 할머니가 그렇게 가신 것이었습니다.

응급처치를 위해 온 응급대원의 말에 따르면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평화로운 마지막이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죽음이었을 거라고요. 자신의 집에서, 평화로운 일요일 저녁에, 자신이 좋아하는 기도 책을 읽다 잠들듯이 맞이하는 죽음. 첨언이지만, 저도 그 이후로 제 마지막이 그랬으면 좋겠노라고 살그머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돌아가신 것을 알면서도 프로토콜에 따라서 응급요원은 응급처치를 해야만 합니다. 10분 이상의 심폐소생술로, 할머니의 갈비뼈는 모두 부러졌습니다. 순서를 돌아가며 심폐소생술을 하는 응급요원들의 눈에서 눈물이 주렁주렁 떨어집니다. 이 시골에서 응급요원은 모두 마을에 사는 자원봉사자들입니다.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지난 몇십 년을 마음에 달고 할머니의 폐에 불어넣는 공기와 함께 그들의 눈물도 방울방울 할머니 얼굴에 떨어집니다. 나는, 그리고 그녀의 딸들은 차마 이 광경을 볼 수가 없어 아직 추운 3월의 밤 집 바깥에서 오들오들 떠며 매정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심한 별들만 셉니다. 지금이 떨림이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죽음이 할머니를 데려가며 남겨놓은 얼음결정 같은 차가움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주는, 예수가 죽은 일주일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주에 할머니의 장례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할머니의 장례를 하던 날 아침 바쁘게 장례가 열릴 공간을 정리하고 이제 곧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할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다, 현관 앞 켠에 자리한 할머니의 사진에 왈칵 눈물이 솟아오릅니다.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를 대신해 이역만리 이 타국에서 내 친할머니처럼 생각하며 사랑한 분이었는데, 그분의 장례를 내가 해야 하다니. 이토록 사랑하는 분을 내가 떠나보내야 하다니.


대책 없이 솟아오르는 눈물에 사람들 눈을 피해 숨어서 끅끅거리며 눈물을 참아냅니다. 나는 울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꿀꺽꿀꺽 눈물을 다시 삼킵니다. 삶의 최초만큼이나 숭고한 삶의 마지막을 나는 울지 않고, 그곳에 신의 대리자로서, 존재해야만 합니다. 나는 그곳에 작은 조각배를 타고 죽음의 강 스틱스를, 혹은 요단강을 건너는 이들이 강의 맞은편 언덕에 무사히 닿기를 바라는 신의 가호를 비는 사람입니다. 다른 울어야 하는 이들이 울 수 있도록, 나는 그곳에 눈물을 받아주는 사람으로 존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날 결국은 이야기를 하다 결국 중간에 한번 북받치고야 말았습니다. 난데없이 긴 침묵에 모든 사람들이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고, 나는 모두의 앞에 서서 눈물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장례를 인도하는 사람이 부들거리며 솟아나는 눈물을 참아내고 있으니, 어느 누가 울지 않을 수 있겠나요. 아직 나는, 그래서 새내기 초짜 죽음을 돕는 이입니다.



이제는 많이 무섭지 않습니다.


이제는 많이 무섭지 않습니다. 산소포화도가 낮아져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르지 못한 얕은 숨을 가랑거리며 뱉는 그 마지막 모습을 보아도, 그곳 구석에 서 있는 죽음의 사신의 그림자가 느껴져도, 이전처럼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설만큼 두렵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짜로 무서웠습니다. 난생처음 내 눈 앞에서 호흡이 멈춘 사람을 보았을 때는, 대체 뭘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5분 전까지 가슴이 미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던 사람의 가슴 움직임이 멎고, 코 밑에 둔 솜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간호사는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더 이상 그 몸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희미할 줄이야. 아직도 TV에서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웨스턴 무비가 방송되고, 주인공은 연신 총을 쏘아대고 있는데, 5분 전에 그곳에 있던 할아버지는 이제 완전히 피안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대도 되는 걸까? 죽음은 전염되는 것은 아닐까? 죽음의 법칙은 어떤 거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는 어쩔 줄을 모릅니다. 아마도 죽음의 사신이 옆에 서 있다가 당황하는 내 모습을 비웃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이 무섭지 않습니다. 이제 삶과 죽음, 그 경계를 천천히 걸어가는 이의 곁에서 돕는 자로 서 있는 것이 많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곳에 영락없이 함께 서있는 죽음의 신도, 그 길을 천천히 나와 함께 걸어갑니다. 그도 그의 일을 수행해야 할 테니까요. 결국 그와 나는 같은 일을 하는 셈입니다. 그 경계를 걷는 이가 힘들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말입니다.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아 차갑게 식어가는 발과 손을 잡고, 내 따뜻한 손의 체온을 통해 신의 은혜가 흘러들어가기를 빌며, 이마에 성호를 긋습니다. 나는 그곳에 따뜻한 애정 한 줄기를 이마에 심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정원사처럼, 내 손가락으로 성호를 그으며, 이곳에서의 마지막 숨을 뱉은 그가, 이제 저 세상에서 첫 숨을 방금 들이쉬었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립니다. 그려진 성호가 마치 부적처럼 천사들이 데리러 올 때 알아보기 쉬운 표식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곳에서의 힘든 마지막 숨을 마치고 저곳에서의 가벼운 첫 숨을 들이쉴 때, 이 곳에서의 안타깝고 눈물 나는 모든 애타는 일들을 잊고, 참되게 평화롭기를 소원합니다.


엄마 아빠 만나는 날


어떤 철학자는, 죽을 줄 모르는 자는 제대로 살 줄도 몰랐던 사람이라고 했다더라고요.

안타깝게도 맞는 말 같습니다. "나는 준비가 됐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간혹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떠나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에 두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종교에서 이야기하듯 착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가는 곳이 나뉘어 있고,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 두려울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어떤 노랫가사처럼, 사랑은 여전히 사랑 이건만,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랑은 마치 뒷면이 있는 것처럼 해석이 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성경의 한 구절은, 죽음을 앞에 둔 모든 두려운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죽음'은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이 곳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쉬고, 그곳에서 첫 숨을 들이쉬며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두 분을 찾아가 와락 껴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의 천일은 하루 같기를 바랍니다. 내가 오기를 바라고 계실 두 분이 지루하지 않게요.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 곳에서의 삶을 잘 살 작정입니다. 태어남과 살아감, 그리고 죽음, 이 모두는 내 '삶'이니까요.


삶의 처음이 무섭지 않고, 오히려 그토록 숭고하며 아름답듯이,

삶의 마지막 또한 무섭지 않고 그토록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태어남과 살아감이 삶의 일부이듯, 죽음 또한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서 삶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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