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내 무릎

저도 중년은 처음이라

by 솦 솦
그렇지, 그때였다.
가까운 공원에 산책을 가서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그대로 엎어진 그때.


그 날 나는 내 무릎이 내 몸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진짜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십 대, 어릴 적 내 몸의 유연함과 강함만 기억하며 '오와 이거 재미있겠다'를 연발하며 바위 위에서 땅으로 폴짝(하는 느낌으로) 뛰어내렸는데, 정작 남들 보기에는 '어이구 이거 흥이 돋는구나'라는 느낌으로 바위 위에서 '허이짜' 하면서 쿵덕 뛰어내리는 중년이었던 것이다. 남들 보기에만 그랬다면 상관없겠지만, 실제로도 내 무릎은 병약하기 이를 데 없어 그 야트막한 바위에서 뛰어내린 몸무게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아아 이런 느낌이로구나 '스러진다'는 표현은.


무릎이 나를 받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대로 엎어지면서도 나는 이런 게 '스러진다'는 표현이구나, 했다. 여태 나는 '갈대가 스러진다'는 등의 표현으로만 알았던 '스러진다'를 내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갈대처럼 연약해 보이는 대상이 바람에 속절없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모습에 스러진다고 표현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내 몸이, 내 무릎이 그렇게 '스러질' 줄은 정녕 몰랐던 것이다.

함께 산책하던 친구가 뒤에서 숨이 멎을 것처럼 나를 보고 웃어대는데, 나는 부끄러움을 미처 느낄 새도 없이 내 무릎에 대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릎이 그저 반항 한 번도 없이 우수수 스러진 통에 쌍 무릎(양쪽 무릎)이 땅바닥에 그대로 꽂혔던 터라 무릎에서 피가 철철 나왔다. 무릎을 땅바닥에 꽂은 뒤 그대로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해서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먼지며 마른 이파리며 할 것 없이 붙여놓았다. (사진도 있다) 계속 누워있을 순 없으니 벌떡 일어나긴 했는데, 아니 내가 왜 이 땅에 이렇게 속절없이 뒹굴고 있단 말인가 싶어서 주저앉은 채로 내 무릎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nature-3084841_1280.jpg 갈대같은 내 무릎아 (출처: pixabay.com)


'아- 나 나이 들었구나'




이런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나이 들었구나. 내 무릎이 내가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강한 친구가 아니로구나. 너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지 어언 사십여 년, 더 이상 너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강한 친구가 아니로구나. 어른들이 계단을 내려갈 때 조심스럽게 난간을 짚고 내려가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이제는 무릎이 부드럽게 다독이며 우쭈쭈 얼러주어야 하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와 가장 가까운 내 몸이 낯설어 보이는 순간, 그 순간이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인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것 같은 그 나이를 어느새 먹었고, 나는 이토록 낯선 내 몸과 함께 동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피를 철철 흘리며, 뼈저리게 (무릎으로 땅바닥을 박은 터라 정말 뼈도 저렸다) 깨달았다.


마음으로는 만년 스물일곱이다.


아주 오래전 뉴스에서 사람들이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나이가 스물일곱 시절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생활도 적당히 했고, 학교 다닐 땐 없던 경제력도 생겼으며(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직 건강하고, 아름답고 젊은 그 나이. 여자들에게는 스무 살부터 (요샌 초등학생부터 한다고는 하더라만) 앞뒤 모르고 그려대던 화장술이 나날이 발전해 화장만으로 성형을 이루어내는 기적을 아침마다 행하는 나이이지 않을까. 뾰족구두를 신고, 꽤 이쁜 옷차림과 가방을 고르고, 부모도 몰라 보실 수 있는 눈부신 미모로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 (철저히 내 경우이겠다만, 화장 전후로 내 자존감의 수위도 달라진다)

생각해보면 바위에서 뛰어내린 그날도 나는 스물일곱에서 아주 "쪼끔" 더 나이를 먹은, 그러나 실제로 나이 먹은 티는 별로 안나는 그냥 스물일곱 같은, 삼십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젊고 건강하다-라는 자아 이미지. 그리고 그 스물일곱 자아 이미지는 무릎의 깨짐과 함께 처참히 산산조각 났다. 무릎이 비실비실해서 그 야트막한 바위에서의 점프도 버텨주지 못하는 '더 이상 젊지 않은 나'가 그 날 새롭게 태어났다. 스물일곱의 아름다운 나여, 바이 바이. 그리고 낯선 내 몸과 동거를 시작하는 그 나이, 중년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아, 나 이제 어찌 살아야 하지?


어찌 살아야 하지?



인간의 몸은 원래 40년이 사용기한이라고 한다. 이는 어떠한 의학적 도움 없이 인간의 수명은 40세까지 살면 오래 살았고 잘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사용기한을 의학의 발전이 돕고 도와서 100세를 꿈꾸는 현재에 이른 것이다. 그래도 사용기한이 아무래도 그렇다 보니 40세 전후로 우리는 몸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마시던 커피를 흘렸는데 가슴이 아니라 배에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이중으로 충격을 받는 것이라던가 (가슴은 어디 갔고, 배는 왜 거기에...?), 예전에는 글자를 가까이 보려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눈을 찡그리며 지그시 신문을 멀찍이 드는 날 발견하는 것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젊은 시절 영리하지 못하여 하루도 포기하지 못했던 하이힐 덕분에 약해진 발목과 무릎은 더 이상의 하이힐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고, 전철을 타고 다니던 통학길 내내 들었던 이어폰은 청력에 위협적인 손상을 가해 이 젊은(?) 중년에게 가는 귀라는 천형을 내려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어폰은 꽂고 산다. 이 젊은 중년은 여전히 어리석어 훗날의 젊은(?) 노년에게 귀머거리를 선물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는 하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다.


나이 든다는 것은,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아서 생각을 재조정하면서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비단 몸뿐이겠는가, 관계도, 세상도, 하물며 세상을 보는 시각마저도 예전 같지 않다. 생각을, 세상과 사람과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이는 마치 사춘기 아이가 사춘기를 겪는 듯 어느 정도의 성장통 또한 내포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중년의 위기 라든가, 중년의 사춘기를 겪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달라진 내 몸과 다시 관계를 재정립하듯 우리는 그렇게 달라진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타인과의 관계를 다시 조율해 가는 것이다. '젊지 않은 나'가 만나야 할 나 자신과 세상, 그리고 너는 누구인가.


그렇다 보니 문득 '사는 게 무엇인가'하는 매우 철학스러우면서도 한심하기도 한 질문을 하게 되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람의 나머지 인생의 반이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태는 젊은 줄 알았던 내가 더 이상 젊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늙어감이 더 익숙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늙어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종국에는 죽음이지 않은가. 이런 우울한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며 결국 그렇다면 한 번 밖에 없는 이 삶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로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즐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결정의 시간이 중년의 사춘기이지 않을까?


실제로 공상과 생각을 하는 것을 즐기는 나는 많은 시간을 '사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데 할애한다. 사십을 갓 넘긴 지금 이제야 세상을 조금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인데 정작 내 몸의 사용기한은 40년, 일 년 전에 끝이 났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아니 이제 좀 살아볼 만하니까 끝나는 게 인생이었어? 싶기도 하다.





다섯 살 무렵 나는 자주 밥을 먹을 때 밥을 씹으며 숟가락도 같이 씹었다. 숟가락을 빼는 것을 까먹어서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씹은 탓이다. 그 무렵 나는 자주 넘어졌다. 아직 머리 크기의 비율이 몸과 맞지 않아 (본래도 머리가 크다) 조금만 중심이 무너져도 약한 다리가 무게중심을 지탱할 수 없어 그대로 넘어진 탓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마흔의 나는 더 이상 입에 숟가락을 물고 그대로 씹지 않는다. 그 정도는 이제 익숙해서 알고있다. 비록 연약한 무릎이 더 이상 못 미덥기는 해도 무릎 보호대를 하고 다니던 다섯 살의 나만큼은 아니어서 추태로 보일만큼 자주 넘어지지는 않는다.

다섯 살의 내가 어린 내 몸에 적응할 시간을 필요로 했듯, 중년의 나는 중년의 나 자신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중년은 나이 듦을 인지하는 나이라서, 아마도 노년의 나는 조금 더 익숙해짐에 수월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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