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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Sep 06. 2018

행복론

그 때 그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나는 친구와 만나기로 한 백화점 앞에 언 발을 동동거리며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색색의 성탄 전구들이 추운 밤하늘을 밝힌, 얕게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어깨를 한껏 움츠린 사람들이 종종거리며 바쁘게 지나치는, 흔한 겨울밤이었다.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백화점 문 앞에 서 있는데, 나보다 몇 해 어려 보이는 해사한 얼굴의 아가씨가 전철역에서 올라오며 내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여인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달려온다. 중년 여인의 얼굴에 웃음이 스민다. 영하의 날씨의 그녀의 얼굴만 따뜻한 봄날같이 환해진다.


"엄마, 추운데 왜 나와서 기다리고 있어. 진짜 추웠지. 얼른 들어가자!" 


해사한 얼굴의, 맑은 웃음의 어린 아가씨는 얼어붙은 엄마의 손을 부여잡아 백화점으로 끌며 엄마의 손을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는다. 자기를 기다리느라 얼어붙은 엄마의 손이 안타까워서 자신의 손으로 녹이고 싶었나 보다. 둘은 환하고 따뜻한, 너무 아늑해 녹아버릴 것 같은 백화점 불빛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진다. 마치 나는 과거의 유령을 보듯 눈을 떼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그 둘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눈으로 좇는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흩날리고, 겨울밤을 밝힌 색색의 성탄 전구는 추위의 맹렬함을 더욱 되새겨 주던 그 밤, 나는 그 둘의 따뜻한 사랑에 울음을 터트렸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거리며 지나치는 낯선 이들 틈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려 백화점 벽을 보며 그 겨울밤만큼 차가운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차가운 겨울밤 공기와 만난 눈물은 흐르는 자국만큼 차가운 겨울 공기를 더욱 끌어당기며, 내가 서 있는 온도를 내 뺨에 더욱 각인시킨다. 나는 이제, 그 둘처럼 녹아버릴 듯이 따뜻한 공간에는 다시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 공간이 이제는 내 곁에 없다. 떠나버렸다, 영원히.


 마치 몇 해 전의 내가 몇 해 전의 엄마를 만나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그 추운 한겨울을 녹여내는 것 같았다. 해사한 얼굴의 아가씨에게 몇 해 전의 내가 겹쳐 보이고, 웃음으로 봄을 살아내던 중년 여인에게서 몇 해 전 봄을 살던 내 어머니가 보인다. 마치 나는 과거의 유령에게 홀린 듯 나와 엄마를 마주했다. 그토록 에일 것 같이 춥던 밤 봄날을 살던 나와 내 어머니가 나를 지나쳐 아늑한 봄 속으로 사라졌다. 참 추운 12월의 어느 밤이었다.




행복 추구자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를 조금 트위스트 하면, 내 이 추운 기억도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을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행하라고 조언했다. 사람은 종종 행복에 대한 환상을 좇지, 진정한 행복을 좇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참 고통스럽게, 베일 것 같이 차갑게 느껴지는 한 겨울밤의 기억은 역설적으로 나와 내 어머니가 가졌던 행복했던 기억들을 소환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 겨울밤의 기억 자체는 내 어머니의 부재, 그 영원한 겨울을 차갑게 퍼올려내는 지렛대이기에 내게는 고통이다. 그러므로 나는 피해야 하는 기억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고통은 내가 가진 기억들로부터 순수하게 행복했던 기억의 파편들을 솎아내어 찾아내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필연적인 행복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죽음 자체가 고통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마음이 고통이므로 우리가 피해야 할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의 부재는 고통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어머니의 부재를 마주하는 내 슬픔이 고통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영원한 부재는 나로 하여금 내가 가진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려내는, 가리개를 덮은 내 눈이 되어주었다. 

엄마의 손을 내 재킷 주머니에 넣고 끊임없이 깔깔대며 걷던 겨울밤의 거리, 눈가의 웃음 주름이 아름답던 내 어머니의 웃음, 아주 어릴 적 팔에 나를 안고 들려주던 동화들, 집에 가는 길이 늦은 나를 마중 나온 엄마의 반가운 얼굴,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서늘한 여름 골목길...... 아주 사소한, 잊힐 뻔한 행복의 파편들이 기억 저편으로부터 소환되어 마치 아지랑이를 피우듯 내 눈 앞에 내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향을 피운다. 나는 내 기억으로부터 행복이라는 쾌락을 마주한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결국 고통도 행복의 필연적인 전제조건의 하나라고 본다. 고통 없이 우리는 우리가 가진 행복의 깊이를 가늠할 척도를 지니지 못한다. 고통 없는 인간은 교만하고, 나태하며, 불평에 빠지기 쉽다. 고통이라는 차가운 쇠자로 우리의 행복을 가늠할 때, 우리는 '삶의 의미'라는 무거운 물통으로 우리의 삶에서 물을 길어낼 수 있다. 아주 작은 숨소리에서도 행복을 찾아내는 검소함을 배울 수 있다. 결국 지금 이곳, 현재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서의 신명기에 "삶을 선택하라(Choose Life)"라는 구절이 있다. 죽는 날까지 살기를 선택하라. 비단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아주 결결이 세심한 매일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삶을 선택하도록 초청받는다. 부정적이고 싶고, 한없이 까칠하고 싶을 때 다시 한번 삶을 선택하고, 한없이 주저앉고 싶고, 끝없이 나태하고 싶을 때, 생명을 선택한다. 

마찬가지로, "행복을 선택하라." 고통스러울 때, 한번 더 행복을 선택하고, 세상에 이렇게 억울하고 한스러울 때가 없을 때, 다시 한번 힘을 내어, 행복을 선택하라. 기억으로부터 행복의 파편을 소환해 꺼지지 않는 향을 피워 올려라. 행복은 항상, 우리의 손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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