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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Aug 18. 2018

'좋아함'이란

노란 프리지어 같은 이 상큼한 단어

참 설레는 단어야, "좋아하다"라는 단어는. 입 안에서 굴려보아도 무언가 꺄르륵 거리며 웃어 넘어가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거든. 왜인지 교복 입은 중학생 아이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무언가 재미있게 이야기하다 동시에 터트리는 그 봄꽃망울 같은 웃음처럼 말이야.  

"좋아하다"는 그 변화형도 모두 예뻐. "좋아함", "좋아해", "좋아해요", "좋은", 좋아"... 명사형이든 형용사형이든 할 것 없이 모두 변함없는 한 가지 의미를 담아내. 사람, 혹은 무언가를 향한 마음 가득한 긍정의 뜻 말이야. 어쩜 이렇게 꽃 같은 단어를 만들어내었는지, 우리 선조들은 이 단어의 어디에서 무언가를 향한 긍정적인 마음을 찾아낼 생각을 했던 걸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좋아하다"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노란 프리지어 꽃이 생각나. 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을 생각하면 프리지어의 더없이 상큼한 그 향기도 함께 내 콧속에서 피어 올라. 그럼 샛노란 프리지어와 그 향기가 "좋아하다"라는 단어를 더욱 좋아지게 만들어. 이렇게 상큼한 노란색과, 마치 레몬에 꿀을 탄 듯한 달콤한 향이 나는 단어라니, 어찌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니 이렇게 상큼 발랄한 단어 "좋아하다"와 함께 연이어 나오는 단어들은 당연히 그 혜택을 볼 수밖에 없어. 프리지어 향기가 그다음 단어에까지 묻어가거든. 마치 꽃술이 가루를 뿌리듯 프리지어의 노란색도 다음 단어에까지 그 가루를 남긴달까? 나는 그래서 이 "좋아하다"라는 단어를 '좋아해'. 함께 오는 모든 단어들을 더욱 좋아지게 만들거든. 


사실 그래서 나는 이 "좋아하다"라는 단어를 조금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 사람들이 나는 "싫어하는 것 빼고 다 좋아한다"라고 말하거든. (모두 그렇지 않나?) 나는 자장면도 좋아하고, 짬뽕도 좋아하고, 치킨도 좋아하고, 전철도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해. 생각해보니, 세상에 좋은 게 이렇게 많아! 그래도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내가 가슴이 두근두근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야. 


나는 '순간'이 너무 좋아. 

어느 잠 못 이루는 여름밤 잠든 엄마의 손을 잡고 천천히 쓰다듬어보는 그 '순간'이 나는 너무 좋아. 십 년 전에 한번 해봤는데, 아직도 그날 밤의 공기와 엄마 손의 감촉이 너무 생생해. 말하자면 영원한 '순간'이 되는 거지.

세상이 나를 잊은 듯이 적막한 깊은 밤, 내 옆에서 베개를 베고 잠든 늙은 강아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듣는 그 '순간'이 나는 미칠 것 같이 좋아. 펄쩍 뛸 것 같아.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시장표 떡볶이를 종이컵에 받아 들고 이쑤시개로 딱 첫 떡볶이를 입에 넣는 그 순간'은 진짜 말로 표현 못하게 좋아. 시장표 떡볶이는 진리야, 암.

몇 달 전부터 밥을 주는 새끼 길고양이들이 어느새 밥을 주러 나가면 내 무릎 위에 기어 올라와서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 '순간'이 나는 너무 좋아. 이러려고 사는 듯이 좋아.


이 순간이 조각조각 이어져서 삶이라는 아름다운 조각보 이불이 되는 거잖아. 그러니 생각해보면, 삶도 꽤 아름다운 '순간'인 걸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해보니, 나는 이 순간이라는 '삶'도 너무 좋아. 조각조각 이어 붙여서 이만큼 길고 넓게 붙여져 왔다니, 새삼 내가 엄청 자랑스럽다. 


사실 삶이라는 조각보 이불은 못난 부분도 꽤 많거든. 내 조각보 이불에서 예를 들어 보자면, 항암제를 맞고 밤새 토하는 엄마 곁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울고만 있던 내 무기력한 '순간'이라던가, 큰 수술을 하고 너무 아픈 밤 너무 외로워서 엉엉 울었던 혼자 있던 병실의 '순간' 같은 것들 말이야. 이 순간들은 너무 좋아서 프리지어 꽃 같다기보다는 아주 파르라니 창백한 셀로판지를 붙여놓은 만화의 한 장면들 같아. 마치 손으로 잡고 있으면 동상이 걸릴 듯 차가운 조각들.


근데 있잖아, 너무 좋아 죽겠는 것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이 파란 덜 떨어진 조각들이, 사실 거기 있어야 하긴 하더라고. 창백한 차가움을 알지 못하면, 따뜻한 온기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산의 깊음을 알지 못하면 산의 높음도 알지 못한다는 어느 등반가의 말처럼, 삶의 조각보는 다양한 무늬로 이루어져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내 좋아 죽겠는 것들 사이에 끼어있는 이 못나고 외로운 조각보들도 나름 좋아해. (완전히 좋아한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Handcraft Tapestry, Turky


어거스틴이라는 옛날 아프리카 신학자는 삶은 마치 태피스트리와 같다고 했거든. (굳이 말하자면 양탄자 같은 건데, 나는 조각보라는 표현이 더 좋아) 가까이서 보면 아주 흉측한 검은색 무늬도 멀리서 보면 그 검은색이 다른 색 무늬를 더욱 선명하게 해주기 때문에 결국 태피스트리에 꼭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인생도 이와 같다고 했었어. 인생에 꼭 있는 고통, 슬픔, 질병, 분노가 참 이해 못하게 흉하고 불쾌한 존재지만, 멀리서 보면 그 존재들 때문에 인생의 다른 부분들이 더욱 선명히 아름다워진다고 말이야. 뭐, 다 맞는 말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부는 맞는 말 같아. 적어도 다른 선명한 아름다움들에 감사하는 소박한 마음이 생기는 거지.


그래서 나는 '순간'이 엮이고 연결된 삶이 참 좋아. 아직도 서걱거리는, 금방이라도 눈발이 내릴 듯이 차가운 조각보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 '순간'도 내 삶을 깊어지게 만들었던 내 조각보이거든. 그리고 그 서걱거리는 차가운 조각보 바로 옆에는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조각보'들이 바로 잇붙여져 있어. 동생과 죽자고 싸운 후 화해하면서 나누는 등 토닥이는 포옹,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터트리는 박장대소, 마음이 연결되는 순간에 함께 흘리는 환희의 눈물 한 방울 같은 것들 말이야. 마치 프리지어가 꽃가루를 뿌리듯 이 조각들이 옆 조각에 노란 가루를 뿌려서, "좋아함"이 전염된다. 그래서 조각보 전체를 멀리서 바라보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삶의 '순간'들이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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