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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Oct 25. 2018

이 애증같은 것

애증같은 것, 혹은 뜨거운 감자같은 것.

어느샌가 글쓰기가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들고 있기는 뜨거운데 그렇다고 손에서 놓을 수도 없는 애증 넘치는 존재.

 중2병이 독하게 걸린 시절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해! 내 일기장만 날 이해한다'며 연애하듯 대화를 주고받던 일기장이 그리웠다. 다시 그렇게 내 글과 진하게 연애하고 싶었달까. 오랫동안 내려가보지 않은 마음의 깊은 그늘까지 닿아보고 싶었달까.

 

 좀 더 직접적인 이유는 영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국말이 주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였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만나 꾸준히 쓰게 되어 다행히 한국말이 다시 많이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급어구는 사용에 어려움이 있다. 어제만해도 친구에게, "그 사람은 예의가 없어."라는 표현을 좀 고상하게 하고 싶었는데, 기껏 생각해낸다는 표현이 "사람이 반상의 도리가 없어."라고 말해버렸다. 양반 상놈도 아닌데 왠 반상의 도리? 미스터 션샤인을 최근에 봤더니 근대 조선어가 많이 늘었다. 현대 한국어가 늘어야 할텐데. 다행히 친구도 도진개진으로 한국말을 까먹고 사는 미국 체류자라 반상의 도리라는 표현이 왜 틀렸는지 잘 몰랐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너도 참 안타깝구나라고 해야할 지.)

 

 어쨌든 내 생각에 내 한국어는 약 80% 정도 회복되었다. 글쓰기 모임을 가입한 아주 직접적인 목적이 꽤 잘 달성된 셈이다. 백프로 회복은 아쉽게도 어려울 것 같다.

 

 글은 항상 내게 좋은 공간이었다.  하늘을 날아 달에 닿을 수 있는 공간으로, 헤어진 남자친구를 잠시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꽃잎이 저버린 꽃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간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모국어는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제2언어는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내게 글쓰기는 두가지 차원의 '노력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노력하는 공간'은 곧 생존의 공간이 된다.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성장하기 위해, 나는 두 언어로 글을 쓴다. 

 

 Writing has always been a good place for me. It had functioned as the place where I could fly in the sky to reach the moon, the place where I could meet my ex-boyfriend who I had missed, and the place where the withered flower could exist as an everlasting full-blown flower.  

 As a person who uses two languages, who needs not to forget the mother language, and strive for polishing up the second language, however, now I see writing as the place where I need to exert with my full strength. And, this place of exertion has soon become "the place of survival." Not to forget, and to thrive, I write in the two langu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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