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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Nov 01. 2018

뷰티풀 마인드

아름다운 정신


천재 수학자 존 내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많이들 봤으리라 생각되는 그런 영화 중 하나.


오늘 오후를 가출한 아이를 찾으며 보냈다. 옆집 아주머니의 전화를 몰래 빌려서는 우리 집에 하룻밤만 재워줄 수 없느냐고 빌며 말하는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했다. 완강한 아버지는 18살이 되기 전까지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엄포를 놓았고, 아버지의 기세에 눌러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 우물거리던 아이는 바깥으로 나가 그대로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아버지를 설득해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재울 생각이었던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두운 핼러윈 밤, 아이를 찾을 수가 없다. 온갖 코스튬을 입고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 사이로 내가 찾는 키 큰 마른 남자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동네를 차로 여러 번 돌았지만 그 작은 마을에서 아이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집에 돌아오는 길 낮게 드리우는 어둠이 너무 무겁다. 

내 책임이 아니라는데 나는 눈물이 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야 고작 밥 한 끼 사 먹이고 손님방에서 재우려던 것뿐이었는데, 그렇게 빌던 아이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에 아직까지 마음이 아리다. 아이에게 나는 실패했다.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 들어서면 안되지만, 아이에게 실패한 사람이어서도 안되었을 텐데, 나는 아이를 들어주지 못했다. 이제 아이는 영영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다. 한 아이를 잃은 것 같은 마음에, 온전한 작은 우주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못한 것은 마음에, 몸이 느리게 움직이는 녹색 괴물 같은 액체가 되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한없이 깔리는 마음을 베개 삼아 넷플릭스를 켠다. 하려던 일들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 대체 내가 뭘 했어야 했는지도 기억이 가물하다. 소파에 동그라니 앉아있는데 내 주위에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얇은 모래가루가 사르르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것만 같다.


2001년에 보았던 뷰티풀 마인드를 다시 켠다. 그리고 초점 없이, 끊임없이 머리로는 집 나간 아이의 궤적을 뒤쫓으며,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길을 잃은 것 같은 내 궤적을 뒤쫓으며 내쉬의 삶을 따라간다.


리만 가설이라는 수학적 논제를 증명하려다 정신분열증에 걸린 내쉬.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뜬금없이 정신분열증에 걸린 한 아이 생각을 한다. 웰슬리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건물 한층에만 200명이 일하는 월스트릿 증권회사에서 회사 유일의 아시안으로 일했던 그 친구. 뒤처지지 않기 위해 중학교 3학년 이후로 하루 3시간 이상 잔 적이 없던 그 친구는 결국 정신분열증으로 가지고 싶었던 모든 것을 잃었고, 이십 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나아지지 않는다. 아시안으로 프롬퀸이 되고, 학생회장을 했던 그 친구는 모두 활짝 웃는 사진 속에서 혼자 무표정한 표정으로 이물감이 느껴질만큼 공간을 떠돈다.


내쉬는 약을 먹지 않고도 자신의 병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고, 평생 병과 싸우며 자신의 공부에 열중한다. 영화에서는 대사 없는 몇 장의 시퀀스로 그 오랜 세월을 지나갔지만, 누구나 알리라, 그 몇 장의 시퀀스에 농축된 그 지난한, 변할 것 같지 않은 눅눅한 여름 한 날의 오후 같은 일상이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으리라는 것을. 주눅이 든 듯한 처진 어깨로 가방을 품에 안고 다니는 내쉬를 놀리는 학생들, 반평생을 연구실도 없이 도서관 한 구석에서 연구를 한 내쉬, 끈질기게 나타나는 환영들, 어제의 천재는 오늘의 광인으로,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뎠을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자만심을 지워낸 내쉬의 연구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명예욕과 자만심을 제외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백발이 된 내쉬는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프린스턴에서 수학을 가르친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 그런 그에게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우연히 들른 교수 카페테리아에서 그는 프린스턴의 전통인 "만년필 수여"의 대상이 된다. 제대로 된 연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오랜 기간 광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모든 학자들이 자신의 만년필을 건넨다.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낸 학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그들만의 방식이란다. 그 장면은 18년 만에 다시 봤음에도 눈물이 난다. 아...인생아.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인정에 대한 갈망없이 내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삶을 삶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내 삶의 궤적을 뒤따라가 보았다. 이 궤적이 마무리될 때의 나는 어디쯤에 서 있을 것인가. 나는 내 궤적에 만족하는가. 다른 모양의 궤적을 그리기를 바랬지만 삶은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전혀 알지 못했던 모양으로 나를 그려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에서도 우리는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존 내쉬가 그러했던 사람이지 않을까. 


아마 하루에도 몇번씩 묻는 것 같다. 정말 지금 이곳에서 만족하느냐고. 

100프로 만족하고 100프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한다.


다시 인생이 알아서 나를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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