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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Sep 26. 2018

한국인이 라흐피협 2번을 사랑하는 이유

한국인의 영혼 중심을 만지는 음악

https://youtu.be/BvXULUeEHHc

라흐마니노프: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손열음,피아노

드미트리 키타옌코,지휘

평창대관령음악제 오케스트라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음악
 사람은 누가 뭐래도 영적인 동물이다. 다만 예술가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영적인 부분에서 좀더 민감할 뿐, 어떤 사람이라도 육적인 부분보다는 영적인 부분이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조두순 같은 흉악범죄자도 그 과거를 역추적해 보면,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한 배경에는 과거의 영적인 원인들이 분명히 있다(흉악범죄자들을 옹호하자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좋고 싫음, 기쁨과 슬픔 따위의 감정들은 분명 영의 지배를 받으며, 이 영적인 어떤 것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옮겨 다닌다. 그러니 “눈빛만 봐도 다 안다”는 류의 워딩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 설문조사를 하면 부동의 1위를 유지하는 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곡이지만 한국인들의 이 곡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수도 없는 종류의 명반들이 존재하고 서울부터 지방 소도시에 이르기까지 돌아서면 라이브로 이 곡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많다. 심지어 지인들 가운데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들려줘도 십중팔구 이 곡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긴다. 대체 왜 이렇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울릴까? 라흐마니노프라는 이름은 상당히 발음하기 까다롭고 또 단번에 기억할 수 있는 특정한 제목도 없는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긴 설명 필요 없이, 이 곡의 정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표적으로 정확하게 맞
춰서 만져주기 때문이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응어리 같은 처치곤란한 감정들이, 모르는 사람이 툭 던진 “괜찮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마”정도의 짧은 한 마디에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되는 그런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가 이 곡을 쓰기 전에 그런 과정을 거쳤다. 러시아의 음악인으로서의 최고의 엘리트 코스 모스크바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태로 당당하게 내놓은 그의 교향곡 1번. 그러나 초연은 참담하다 못해 재앙적인 실패로 끝났다. 실패 한두 번은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당시 러시아 음악계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들에게 인격살인 수준의 막말을 들어야 했다.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몇 년간 작곡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암시요법이라는 치료법으로 라흐마니노프를 진료했는데, “당신은 곧 위대한 협주곡 한 곡을 쓰게 될 겁니다”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주고 라흐마니노프에게도 저 문장을 반복적으로 되뇌이게끔 했다. 이 치료법으로 멘탈리티를 회복한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펜을 들어 이 위대한 협주곡을 써냈던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고군분투는 바로 평범한 한국인의 이야기
 그런 만큼 이 곡 안에는 잔인한 막말 몇 마디가 줬던 폭격맞은 듯한 심신을 딛고 일어서려는 작곡가 자신의 고군분투가 처절하리만큼 녹아 있다. 악보를 보면 혼란스럽다 싶을 정도로 박자지시가 계속 바뀌고 있는데, 이것만 봐도 라흐마니노프가 느꼈던 고통이 가슴으로 절절히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음악은 감성적이지만 선 굵고 뚝심 있게 계속 간다. 그리고 중간중간 나타나는 눈부시다 못해 눈이 멀 것만 같은 극히 아름다운 멜로디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눈물샘을 강하게 자극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이렇게 얽혀 나가던 음악은 3악장에 와서 활기찬 리듬을 되찾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까지는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코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비가는 희망가로 서서히 변해가더니 찬란한 환희로 마무리된다.

 이 곡에 공감하는 한국인들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음악 자체가 품고 있는 네러티브에 영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특히나 이 나라처럼 나이가 벼슬이고 돈이 벼슬인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격살인 수준의 막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이 곡이 품고 있는 네러티브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공감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가볍지 않은 병으로 투병 중이거나 마음고생이 심한 상황이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도둑처럼 가슴속에 침투해서 사람의 영 한가운데를 어루만진다. 그러니 이래저래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곡이다.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것. 그런 면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만큼 성공한 곡도 달리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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