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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Sep 30. 2018

네 얘길 들려줘, 무엇이든 괜찮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무한한 공간

https://youtu.be/1_sIdXTqXKU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안드라스 쉬프, 피아노

 

네 얘길 들려줘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 가운데 최고의 대작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애시당초 작곡동기가 “수면제용”이었다지만, 그 이야기의 진위는 한 번쯤 정확하게 가려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잠오게 하는 것이 목적인 음악이 어떻게 이렇게 쓸데없이(?)규모가 크고 전례가 없을 정도의 고도의 작곡테크닉이 총망라되어 있는가?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이야기다. 실제로 아무런 생각 없이 들으면 잠오기 딱 좋기도 하니까. 그러나 조금만 알고 접하면 이 대곡은 오히려 오던 잠도 달아나게 만드는 음악이라 봄이 더 옳다.

 작곡기법적인 것이 궁금하다면 작곡 전공자들을 찾자. 그렇지만 작곡기법적인 부분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거대한 변주곡을 가지고 나눠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다. 그걸 모두 언급하려면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은 족히 나올 것이다. 나는 다만 여기서 스토리텔러의 성격을 지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논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 거대한 변주곡은 일단 연주자에게 “네 얘길 들려주지 않겠니?”라고 자상하게 물어보면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유도한다. 마치 잘 작성된 설문지를 보듯, 다양한 작곡기법이 담긴 각각의 변주들이 연주자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 굴드와 고난 속의 꽃 샤오메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있어 절대 빼놓지 못하는 불멸의 이름이 있다. 바로 글렌 굴드다. 굴드는 여러 종의 동곡 녹음을 남겨놓았는데, 그의 앨범은 단 한 번도 절판된 바가 없다. 클래식 음악의 특성상 99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시중에 나온 음반들은  절판과 리이슈를 반복하는데, 이것만 해도 대단한 기록이다. 그냥 믿고 사는 스테디셀러란 얘기다. 그런데 다른 연주들을 듣고 굴드의 연주를 다시 접해 보면 다분히 파격적이다. 한 소절만 들어도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해서 때로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곡 자체가 가지는 고유의 보편성과 확장성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일견 제멋대로인 것만 같은 굴드의 이야기를 넉넉히 수용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깊고 넓음 말이다. 그런가 하면 전혀 다른 예도 있다. 중국인 피아니스트 주 샤오메이도 이 변주곡의 뛰어난 명연을 남겨놓았는데, 그녀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온갖 정치적 탄압을 다 받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본 인물이다. 그 험난한 인생길에서 얻어낸 “해탈의 경지”가 연주 속에 다 녹아 있어 숙연해진다. 똑같은 악보를 가지고 연주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를 강하게 보여주면서 흥미를 유발시키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겪은 말로 표현 못할 험난한 고초를 녹여낸다. 이 두 피아니스트는 예시에 불과하고,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 안에 각기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거대한 변주곡은 인간군상의 어떠한 이야기를 담아내도 넉넉히 품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항상 우리와 같이 걷는다
 기술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그리고 머리로 이해하려 들면 마치 관심을 보이면 으레 도망가는 고양이 같은 곡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그런데 고양이를 키우는 모든 사람들이 동물학자들처럼 생물학적으로 고양이를 연구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저 고양이와 얼마나 더 잘 소통할 수 있을까에만 신경쓸 뿐이다. 마찬가지다. 전문 피아니스트들도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학문적인 연구가 선행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는 머리보다 가슴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어떠한 이야기도 넉넉하게 담아내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이 거대한 곡 앞에서 가슴에 빗장수비를 쳐버릴 용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문자적으로 말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읽어낼 수만 있다면,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위대한 곡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편안한 곡으로 다가온다. 앞서 잠시 언급한 구조적인 면을 잠깐 훑어보면, 결국 가슴이 내리는 결론이 있다. 정말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구조를 갖고 있지만 듣는 이의 스텝과 눈높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맞춰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괜시리 구조에 겁먹을 필요 전혀 없다. 그 구조라는 놈이 사람의 마음보다 앞서가거나 뒤처짐 없이 보폭 맞춰 같이 걷고 있기에,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능히 다 수용할 수 있기에!

 한편, 이 곡을 논함에 있어서는 추천음반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워낙 명반도 많고 해석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일단 앞서 예로 언급한 굴드(소니)는 오랜 시간 검증된 명연이라 후회는 없을 것이다. 주 샤오메이의 연주는 이 곡에서 깊이를 느끼고자 한다면 최고의 선택이고, 모던하고 세련된 연주로 안드라스 쉬프(ecm)를 추천할 만하며, 진지하고 학구적인 에프게니 코롤리오프의 2008년 라이프치히 바흐 페스티벌 실황(유로아츠)또한 머스트헤브 아이템이라 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빌헬름 켐프(dg)가 담아낸 순수하고 담백한 소리의 향연도 놓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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