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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Oct 05. 2018

잘츠부르크에서 탈출하고파-모차르트 피협 9번

스무 살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반란

https://youtu.be/GdXj0nR6VF8

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9번 Eb장조 k.271 “죄놈”

알프레드 브렌델, 피아노

네빌 매리너, 지휘

ASMF 오케스트라



생존시엔 푸대접, 사망후엔 칙사대접
 나는 잘츠부르크를 두 번이나 방문했다. 그 도시만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다. 그런데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 조그만 도시는 오늘날에도 227년 전에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가 먹여살리는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카라얀이란 걸출한 지휘자가 나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부흥시키면서 잘츠부르크의 경제에 크게 일조하기도 했지만, 모차르트가 두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미쳐온 파급효과에 비할 바는 못된다. 모차르트를 빼놓고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도시가 잘츠부르크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생존할 당시,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잘츠부르크는 시대를 앞서나간 천재 모차르트가 발 붙이기에는 너무 좁고 보수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럽 전역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각지의 선진화된 음악 기법들을 온 몸에 흡수한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에서 주어진 일자리는 고작 대주교 밑에서 교회음악이나 쓰는 정도였다. 박봉인 거야 차치하고라도 전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젊고 패기 넘치는 모차르트는 이 환경을 너무나 힘들어했다.

수십 년 뒤를 내다본 모차르트의 혜안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곡 중에 하나가 피아노 협주곡 9번 “죄놈”이다. 그런데 그토록 폐쇄된 환경에 갇힌 젊은이에 의해 쓰여진 곡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약관 스무 살의 청년이 썼다고 하기엔 너무나 완숙한 퀄리티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곡을 전후한 곡 몇 곡과 비교해보면 놀라 까무러칠 지경이다. 오프닝부터 심상치 않다. 내지르지 않으면서 우아하게 샅바싸움을 하는 듯한 오케스트라와 솔로 피아노의 맞대결로 시작되는 오프닝은 단 몇 초나마 시공을 초월했다는 생각마저 들곤 한다. 이런 식의 오프닝은 훗날 베토벤이 마흔 가까이 되어서야 자신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에서 써먹은 방식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곡과 베토벤 황제 협주곡의 오프닝은 같은 키를 쓰면서 화성 사용도 거의 유사하게 간다. 단지 베토벤이 좀더 전투적이고 화려할 뿐이다. 이건 수십 년 뒤를 훤히 바라보고 있던 모차르트의 엄청난 혜안의 증거라 여길 수밖에 없다. 그 뿐인가? 오페라의 어법을 노골적으로 먹인 2악장과 정신없이 빠른 템포로 가는 3악장 중간에 능청스럽게 우아한 미뉴에트를 뜬금없이 집어넣는 대담함도 들을 때마다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천재가 미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듯해 때로는 공포감마저 느껴진다. 이러한 이 협주곡을 가리켜 페르치오 부조니는 “젊은이처럼 활기차고 노인처럼 지혜로운 작품”이라며 극찬한 바 있다.


탈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에게 절박했다
 고향에 강제로 갇혀 있다시피 한 스무 살 모차르트의 손끝에서 어떻게 이런 시공을 초월한 걸작이 나왔을까? 내 생각에는 모차르트가 고향을 탈출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겼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현실상 쉬운 건 절대 아니었다. 당시의 시대로 본다면 잘츠부르크에 잡아 놓은 일자리를 떠난다는 건 스스로 굶어 죽겠다고 자처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라는 작은 동네에서 썩기에는 이미 너무 커버린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잘츠부르크에 이미 마음이 떠난 모차르트는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 뿐만 아니라, 아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를 원했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의 갈등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십 년 앞을 바라보는 찬란한 영감으로 가득 찬 이 곡을 써서 처절하게 자신을 알린 것이다. 그래서 밝고 우아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건 절박함이 묻어나기도 하는 곡이 되었다.
 
 그토록 고향 잘츠부르크를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갈았던 시대를 앞서간 천재 모차르트. 그러나 살아생전 모차르트의 재능을 억누르기 바빴던 오스트리아의 이 시골도시는 지금 모차르트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살아가는 도시가 되어 있으니, 세월은 오래 가고 볼 일이다. 그곳을 떠나는 것만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던 모차르트가 자신의 이름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고향을 다시 살아돌아와서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의 피아노 협주곡 9번을 천 번쯤 들으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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