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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Oct 03. 2018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같은 음악, 슈만 노벨레텐

음악으로 읽는 8개의 단편소설

https://youtu.be/iR3j518TOLo

슈만:8개의 노벨레텐 op.21

클라우디오 아라우,피아노



단편소설의 성질을 음악에 가져오다
 잘 알려진 소설들을 찾아 읽다 보면 때로는 묵직한 장편소설보다는 가벼운 단편소설이 끌릴 때가 있다. 단편소설은 진행이 빠르고 길이가 짧은 만큼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의 재미가 쏠쏠하다. 더군다나 단편소설은 큰 그림이라기보다는 퍼즐의 한 조각 같은 여운을 남기곤 하는데, 이것이 주는 감흥은 음미해보면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같은 잔향에 비유할 수 있다.

 슈만은 이러한 단편소설의 성질들을 음악에 녹여냈다. 그것이 작품 21로 묶인 8개의 소품 “노벨레텐”이다. 노벨레텐은 독일어로 단편소설의 복수형을 의미한다. 문자적인 단편소설의 뜻을 그대로 제목으로 갖고 온 셈이다. 비록 유명한 다른 피아노곡들보다는 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슈만의 캐릭터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결코 과소평가할 곡들이 못 된다. 오히려 지극히 슈만다운 작품들이라 봄이 옳다.

 이 8개의 노벨레텐은 다시 2곡 1조로 묶어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이 행위는 별로 의미가 없어보인다. 여덟 곡이 각기 다르게 생긴 조각들을 가지고 음악을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큰 그림을 놓고 보면 슈만의 영감의 원천이자 불멸의 연인 클라라로부터 프리패스로 밀려들어오는 악상들이 가득차 있지만, 클라라가 주는 영감의 가짓수가 한두 가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놀랍다. 슈만의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화수분 같은 이 많은 영감들의 진원지는 오직 클라라 하나 뿐이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판타지나 크라이슬러리아나, 유모레스크 같은 대곡들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곡들도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곡의 규모들이 있는 만큼 그 많은 감정들이 하나의 줄기에 수렴해서 가는 반면, 노벨레텐 여덟 곡에서는 조각 하나 단위로 간다. 그걸 다 담아내려다 보니 악상의 변화가 매우 극심하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는 손보다 머리를 빨리 돌려야 하는 곡들이다.

진정한 감정표현의 옥토, 비료가 필요 없다
 그러나 바꿔 표현하면, 피아니스트의 상상력을 무제한으로 투영할 수 있는 곡들이라는 의미도 있다. 한 마디로 기름진 옥토 같은 곡들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류의 큰 틀만 하나 갖고 있으면, 디테일한 감정의 조각들을 표현하는 것은 전적으로 피아니스트의 몫이다. 상당한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같은 작물의 농사를 지어도 농부마다 키우는 노하우들이 각각 다르듯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투영하기에 이 여덟 곡만큼 좋은 곡들도 드물다. 비료를 굳이 쓰지 않아도 과일이 끝없이 나오는 옥토처럼, 이 여덟 곡들은 지나치게 각 잡고 들을 필요도, 연주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이 상상한 그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그것이 그냥 정답이 되는 곡들이다. 적어도 박자와 리듬, 악상지시 정도만 잘 지켜 준다면.

 단편소설의 느낌을 그대로 음악에 가져온 슈만의 아이디어는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놀랍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자보다 음악의 호소력이 훨씬 강한데, 그 음악 위에 단편소설의 느낌을 입힌 것이니 그 파급효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다. 이 곡들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미미한 것이 아쉽다. 하지만 적어도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곡들의 캐릭터와 금방 친해질 것이다. 어차피 말 많은 사람을 좋아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지 않다. 그런데 욕먹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토록 맘껏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음악이 떡하니 존재한다는 건 인류의 축복이다. 연주를 못 하겠으면, 들으면서 의미부여를 해도 된다! 그럴 수 있는 섬세한 감정의 조각들이 이 여덟 곡 속에 지천으로 깔려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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