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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Aug 31. 2018

지휘자 사관학교가 된 베를린 필

베를린 필이 보여주는 숙의민주주의의 모범답안

https://youtu.be/_yqKIawD0q4

차이코프스키:교향곡 6번 b단조 op.74 “비창”

키릴 페트렌코,지휘/베를린 필하모닉


어랏, 이게 내가 알던 차이코프스키 비창이 맞나?

래틀의 후임으로 올해부터 베를린 필을 이끌게 되는 키릴 페트렌코의 차이코프스키 "비창"실황을 들어 보았다. 기대가 컸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좀 실망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기대한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는 게 맞을 것이다. 페트렌코가 러시아 출신인 만큼 러시아 스타일의 스케일 크고 끈끈한 소리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기술적으로 대단히 깔끔하고 꼼꼼했다. 페트렌코의 커리어를 살펴 보니 빈에서 공부했고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주로 활동했던 걸로 나온다. 그래서 러시아인이지만 스타일은 독일, 오스트리아 쪽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다.



베를린 필의 패러다임은 서서히, 그러나 확고히 변해간다


 어찌 됐건 페트렌코의 차이코프스키는 처음부터 내 귀를 잡아끄는 매력은 없었다. 심지어 그는 불과 45세의 젊은 지휘자다. 베를린 필이 이 젊은 지휘자를 자기네들의 수장으로 왜 선택했을까? 그런데 시계를 30년만 앞으로 되돌려 보면 의외로 쉽게 답이 나온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식화된 생각, 즉 최고의 지휘자만이 종신토록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잡는다는 개념은 사실상 카라얀이 마지막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카라얀의 후임 아바도도 원래는 종신계약이었다. 그러나 아바도는 12년 후 스스로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 과정에서 아바도는 위암 투병이란 목숨을 건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무수한 스토리가 있지만, 간단히 말해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동행 12년 동안 혁명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내려놓은 아바도는 베를린 필에서의 지난한 여정을 밑천 삼아 그 후 10년 이상을 무한한 존경을 받고 살다가 명예롭게 세상을 떠났다. 아바도를 기준으로 베를린 필의 패러다임은 변했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에 입성할 당시, 음악계에는 선배 거물급 지휘자들이 즐비했다. 하마평에 오르내리던 수많은 거물들을 제치고 베를린에 깜짝 입성한 아바도가 베를린 필의 노회한 단원들과 쉽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건 뻔했다. 이런 단원들을 상당수 교체해가며, 아바도는 베를린 필과 함께 성장했다. 후임 래틀도 마찬가지다. 단원들과 래틀의 기싸움은 치열했다. 심지어 래틀은 베를린 시 공무원들과도 피터지게 싸워가며 일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과정에서 부작용은 좀 있었겠지만 베를린 필은 최근에 화두가 된 바 있는 용어 "숙의민주주의"가 뿌리깊이 정착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래틀 또한 베를린 필과 함께 성장했고, 무르익은 그를 고향에 있는 런던 심포니에서 모셔갔다. 나는 올해부터 시작된 래틀의 런던 심포니 임기를 크게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베를린 필이 성장시켜 놓은 지휘자가 고향에서 발휘할 능력은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겠지만, 숙의민주주의가 정착된 전세계의 드림팀 베를린 필에서 객원지휘자라도 한 번 맡으면 지휘자가 급성장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포디움에 올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음악의 달인들이 백 명 이상 우글대는 정글 속에서 지휘자가 무슨 재간으로 그들을 통솔하겠는가. 그들을 수긍하게 할 만한 "한방"이 없으면 안 된다. 지휘자가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다. 여차하면 지휘자를 잡아먹을 수 있는 단원들이 대부분인 곳이 베를린 필인 것이다.


베를린 필이 키워갈 포스트 카라얀을 기대하며
 그래서 페트렌코도 비록 처음 들어본 연주는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그 또한 크게 기대하고 있다. 베를린 필이 이 45세의 젊은 지휘자를 어디까지 성장시킬 수 있을지 기대되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의 지휘봉을 내년부터 10년을 잡아도 페트렌코의 나이는 불과 55세. 어쩌면 우리는 머지 않은 미래에 카라얀을 능가하는 능력을 지닌 지휘자와 동시대를 살아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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