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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Oct 24. 2019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바흐만 같다면...

전도는 이렇게 하는 거야!


나는 20대 중반부터 정확히 10년 동안 교회에 몸담았다. 교회에서 했던 일도 적지 않았다. 피아노를 좀 칠 줄 안다는 이유로 무려 8년을 한 개척교회의 반주자로 활동했고 호주에 머무르던 기간에는 소그룹 리더를 맡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교회에 발길을 끊은 지 어느 덧 1년이 됐다. 이유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교회 내의 꽉막힌 “꼰대”들의 등쌀이 원인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반공극우의 편에 서서 온갖 혐오발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교계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양심없는 행동들이 늘상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통해 여과없이 쏟아져 나와 혼란스러웠다. 결국 오랜 내적 갈등 끝에 나는 교회라는 집단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음악인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교회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마 그중 대부분의 지분은 바흐가 차지할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레전드에 평생토록 충성스럽게 신을 찬미하는 음악을 썼던 진정한 신앙인 아닌가? 그런데 바흐의 음악을 듣거나 직접 연주해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식적인 개신교의 이미지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명제와 직면하면 혼란이 온다. 일단 극도로 질서정연하며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최대한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 바흐의 음악이다. 바흐가 노리는 타켓은 오로지 사람의 마음의 중심일 뿐이고, 다른 것은 아예 노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견 보면 기독교의 중심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성서는 “신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라고 수백, 수천 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으니까. 

https://youtu.be/w6eDcEVtIK8


바흐 :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마이라 헤스 피아노 편곡)

빌헬름 켐프, 피아노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바흐의 음악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범용성과 보편성이다. 아무 곡이나 한 곡 골라 원곡과 다른 악기를 위해 편곡해도 충분히 호소력이 있는 음악이 백발백중 나오며, 그 호소력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사례가 많이 기록되고 전파되어 있다. 첼리스트 요요마는 “바흐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바흐의 첼로 모음곡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담고 있는 음악이며, 세계 곳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가 바흐를 듣는다면 사회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발언은 앞서 언급한 바흐의 범용성과 보편성을 설명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그런데 바흐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회의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이 나라 교회는 혐오발언이 난무하고, 부패한 정치인들과의 링크는 이제 놀랄 일도 아니며, 급기야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까지 와 있다. 이러니 역으로 바흐의 음악이 더 찬란하게 빛나 보인다. 혐오발언, 정죄, 편가르기, 극단적인 이익 추구 따위의 악취나는 불순물이 없는 음악으로 못을 박는 순도 100퍼센트의 설교인 셈이다. 편향된 단어들만 가득한 목사님의 50분짜리 설교를 듣는 것보다, 3~4분 남짓 되는 바흐의 칸타타 147번의 합창곡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한 번 듣는 것이 신의 본심에 더 쉽게 다가가는 방법이리라. 

https://youtu.be/LSWWmWHYSdo

바흐 : 마태 수난곡 중 2중창과 합창 “마침내 나의 예수는 붙잡혔다”

필립 헤레베헤, 지휘

콜레기움 보칼레



 나는 교회라는 집단을 떠났지만, 여전히 신앙인으로서 확실한 간증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바흐의 음악이 있다. 어느 날 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성 토마스 합창단의 바흐 마태수난곡 내한공연을 보러 갔다가, 음악이 연주되는 세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부흥회에서나 느낄 법한 종교적 열광을 체험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에 대한 “미련”을 애써 억누르며 살아왔던 여태까지의 내 인생에 종지부를 찍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신이 직접 나는 음악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귓등에다 대고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망설임을 버리고 그 직감에 바로 따랐다. 피아노를 다시 잡았고 입시 레슨을 받았다. 그리고 고작 3개월을 레슨 받고 피아노과 대학원에 합격했는데, 시험장에 응시자가 나밖에 없는 기적이 벌어졌다. 사실상 바흐가 오로지 음악의 힘만으로 신의 뜻을 내게 관철시킨 셈이다. 이러한 기적같은 과정을 거쳐 대학원을 졸업한 지금, 나는 충분한 돈을 벌지는 못하고 때로는 경제적으로 힘겹기도 하지만, 적어도 행복지수는 직장 생활을 할 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깊이 고찰해 본다.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흐만 같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울까. “오직 예수만이 진리”라는 기독교 교리의 배타성은 일견 강한 거부감을 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신앙을 평생토록 지켜온 바흐가 작곡한 음악과 직면하면 저 명제는 부정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진리가 된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바흐만큼 예수를 올바로 믿은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이며, 또한 바흐만큼 예수를 바르게 전한 사람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누가 있겠는가. 목사들?? 솔직히 말하건데 바흐에 그 목사들을 비교하는 건 바흐에게 엄청난 실례다! 앞서 언급한 첼리스트 요요마의 발언도 바로 그러한 맥락이리라. 바흐를 좀 더 잘 알고 꾸준히 공부하고 싶다. 그래서 막무가내 전도를 일삼는 이들에게 역으로 제대로 된 바흐를 전하고 싶다.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바흐처럼 예수를 전하는 것이 전도의 모범답안이라는 것! 그 방법론은 늘 연구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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