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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Oct 27. 2019

토스카니니를 넘어선 사나이,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90을 넘긴 한 노인의 셀프 노인학대(?)

https://youtu.be/P8Gk3lGOeUY

드보르작 : 교향곡 7번 d단조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

빈 필하모닉(2018년 실황)


 우리는 보통 노익장 지휘자의 아이콘으로 얼른 토스카니니를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흔히 듣는 토스카니니의 음반들은 그의 나이 80을 넘긴 시대에 대부분 녹음된, 그의 이름을 걸고 창단한 NBC심포니와의 연주들이다. 시대가 오래된 만큼 음질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토스카니니의 NBC시절 연주들은 놀랍다. 어느 연주든 마그마처럼 불타오르는 에너지가 있고 템포는 요즘 기준으로 봐도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며, 그러면서도 리듬은 자로 잰 듯이 정확하고 명쾌하고 역동적이다. 대체 이런 연주가 어찌 80이 넘은 노인에게서 나오는 연주인가 싶다. 토스카니니의 그 시절 일화들이 이것을 뒷받침하는데, 그는 80이 넘어서도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가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고, 기차를 탈 때도 뛰어서 타고 뛰어서 내렸다고 한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구석에 앉아 쉬고 있는 한 노인을 뒤에서 지인들과 놀렸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놀랍게도 그 노인은 토스카니니보다 열 살 이상 어렸다고 한다! 이러한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성격은 그의 일기장에서도 발견되는데, 80세의 토스카니니가 쓴 문구가 걸작이다. “나는 분명 노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신께서는 17세 소년의 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그러나 이렇게 에너지가 넘쳤던 토스카니니도 갈 때는 “한 방에 갔”다. 그는 87세가 됐을 때 라디오 녹음용 콘서트를 지휘하다가 30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상태를 체험했고, 그날로 은퇴를 선언했으며 3년 뒤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토스카니니가 떠난 지 70년 가까이 되는 지금, 그의 노익장을 아득히 넘어서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스웨덴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다. 일단 그의 나이는 1927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93세다. 그런데 이 노거장의 활동량을 보면 정말 말이 안 된다. 물론 세이지 오자와나 하이팅크처럼 그와 비슷한 또래의 현역 지휘자는 몇 명 더 있지만, 대개는 띄엄띄엄 활동한다. 90이 넘은 노인이 한두 시간을 그냥 서 있는 것만 해도 힘들 지경인데, 지휘 활동을 자주 하기가 쉽겠는가? 그런데 블롬슈테트가 작년에 무대에 오른 횟수는 무려 100회 가까이 된다. 거의 3,4일에 한 번 꼴로 무대에 오른 셈이다.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경우는 소속사에서 연주 횟수를 50회 이내로 관리해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되는 활동량이다. 이 정도면 “셀프 노인학대”라 칭해도 되지 않을까? 최근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빈 필을 이끌고 대규모 교향곡인 말러 9번을 연주했고, 내년 여름까지 베를린 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등 거물급 오케스트라들을 쉼없이 지휘하는 빡빡한 일정이 대기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가 지휘하는 주력 레퍼토리들을 보면 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말러 교향곡 9번은 물론이고, 브루크너 교향곡들, 브람스 1번, 베토벤 장엄미사 등 “크고 아름다운”곡들만 골라서 지휘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오랜 블롬슈테트의 팬으로서 그가 젊을 때부터의 흐름을 보면, 그는 나이가 먹어갈수록 음악이 도리어 역동적으로 진화하며, 노쇠화는 그 어떤 프레이징 하나에서도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를 지휘해 완성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 음반이다. 한마디로 명불허전의 명연이다. 프레이징 하나하나가 싱싱하게 살아 있으며 최적의 상태로 블랜딩된 성부간 밸런스가 알차게 꽉 찬 울림을 낸다. 이 연주들이 품고 있는 역동적인 감각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도 명연으로 회자되고 있는 토스카니니의 그것을 오히려 능가한다. 대체 이 정력적인 노인에게 끝은 없는 것인가?


https://youtu.be/eOafN6r1Jcs

말러 : 교향곡 9번 D장조 중 4악장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 지휘

밤베르크 심포니


 나는 블롬슈테트의 젊은 시절의 행적이 지금의 이 말도 안되는 활동량의 밑거름이라고 본다. 비록 그의 나이는 지금 90을 훌쩍 넘겼지만 그가 음악팬들에게 지금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 지는 의외로 오래 되지 않았다. 그는 80년대에 10년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맡아 미국에서 활동하게 된 이래로 존재감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즉,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인물이라는 것. 그는 스웨덴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젊은 시절의 주 활동 무대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중심으로 한 구동독 지역이었다. 동독 지역이 주 활동 무대였기에, 그는 매스컴에 자신을 드러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마 그는 이러한 기나긴 무명(?) 시절을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보냈을 것이다. 그 근거는 어떤 작품을 연주하든 나타나는 완벽에 가까운 밸런스와 학구적인 어프로치에 있다. 실제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내한공연 때 무대 뒤에서 만난 한 단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블롬슈테트는 학습량이 엄청난 지휘자이고, 전형적인 음악학자라고 한다. 즉, 이러한 내공이 지금에 와서 90이 넘어서도 끊임없이 분출되는 에너지의 원동력인 듯하다. 그의 음악은 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보통 저명한 거장들이 공연을 가지면 음악팬들은 큰 기대와 흥분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그것조차도 뛰어넘었다. 기대, 흥분 따위를 넘어 아예 안심을 시켜버린다. 그의 음악을 들을 때는 어떠한 마음의 준비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 맡겨버리면 그걸로 감동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https://youtu.be/8ClN0Q5cah0

베토벤:교향곡 3번 "영웅"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지휘

파리 오케스트라



 이 노인의 연배가 연배이니 만큼, 언제 가도 그는 천수를 누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간다면 분명히 음악의 역사는 바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토스카니니를 노익장의 아이콘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블롬슈테트가 간다면 그  타이틀은 그가 앗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가시적인 기록상으로 블롬슈테트의 발걸음은 토스카니니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가 언제까지 이렇게 정력적으로 활동할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가 활동량을 10분의 1로 줄인다고 해도 그 어느 누구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금도 살아있는 전설이기 때문이다. 그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시기만 해도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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