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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Nov 02. 2019

신이 주시지 않은 마지막 행복

멘델스존 오라토리오 "엘리야"


https://youtu.be/pduEw6cn5N0



 내가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로 듣는 경우는 딱 두 가지가 있다. 스스로 감당을 못할 정도로 화가 나 있거나 장거리를 운전해야 할 때 듣는다. 일단 이 거대한 곡이 품고 있는 활화산 같은 분노와 극적인 진행은 내가 화가 나 있을 때 충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드라마틱함은 전날 한두 시간 자고 운전대를 잡아도 자연스러운 각성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졸음운전을 방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어떻게 보면 나에겐 참 고마운 곡이다. 요즘 나오는 차에는 다 달려 나오는 ADAS 장비들보다 더 확실한 안전을 운전할 때 보장해주지, 분노를 느낄 때마다 날 확실하게 달래고 보듬어 주지, 이런 충신 같은 곡이 달리 어디에 있겠나 싶다.


 “엘리야”는 멘델스존이 남긴 곡들 가운데 회심의 역작이면서, 여타의 곡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멘델스존의 이미지는 고전적인 화성의 틀을 철저히 지키면서 표현을 극대화한, “고전주의적 낭만주의자”다. 이는 멘델스존의 성장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금수저 집안에서 성장한 그가 뭐가 아쉬워서 감정기복이 심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면은 멘델스존이 살았던 한가운데의 낭만주의 트렌드에 비춰보자면 예술적으로 약점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부분을 멘델스존과 또래인 바그너는 집요하게 공격했고, 급기야 세월이 지나 독일의 음악계에서 나치에 의해 멘델스존이 일시적으로 매장되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할 말이 많지만, 어찌 됐든 금수저에 유대인의 혈통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멘델스존을 죽어서까지 괴롭힌 약점이 된 셈이다. 멘델스존은 금수저로 성장한 유대인이 뭐가 아쉬울 게 있겠냐는 세간의 인식에 맞서 제대로 된 “한 방”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의 강력한 표현이 바로 “엘리야”다. 


 멘델스존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이 거대한 대작을 써 나갔다. 그리고 영국에서 초연하여 그의 염원대로 크게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신은 이 곡으로 반석 위에 오른 그의 입지를 오랫동안 지킬 권리는 주시지 않았다. 영국에서 거둔 열광적인 성공의 여세를 몰아 본국 독일에 돌아와 베를린에서 초연을 준비하던 멘델스존은 어릴 적부터 애틋한 사이였던 누나 파니 멘델스존의 뜬금없는 사망소식을 접하고 실의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고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누나의 뒤를 쫓아가고 말았다. 누나의 존재는 멘델스존의 인생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 중 하나였다. 세간의 왜곡된 인식과 꼰대근성이 가득한 아버지의 억압에 맞서 두 남매는 늘 끈끈했고 애틋했는데, 누나가 42세라는 젊은 나이로 먼저 가 버리니 멘델스존의 멘탈은 구멍뚫린 댐처럼 무너져 내렸던 것이었다. 결국 이 대작은 본인과 누나 둘 모두의 레퀴엠이 되고 말았다.


 이 거대한 대작을 악보를 보면서 들어보면 때로는 공포감마저 느껴진다.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격렬한 리듬과 음형들이 난무하고 포르티시모를 지시하는 악상기호들이 유난히 많으며, 악보 중간중간에 이탤릭채로 표시하는 강력한 악상지시들도 각자의 존재감을 날카롭게 과시한다. 이러한 악보의 그림은 여타 멘델스존의 작품들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는 스타일이다. 악보가 묘사하는 음표의 그림들이 이미 깊은 분노를 진하게 풍기면서 위압적으로 다가오며, 듣기만 할 때 느끼는 육감적인 분노의 정서를 넘어 오감으로도 적나라하게 피부로 다가온다. 어쩌면 멘델스존은 이 곡을 쓰면서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깊은 분노가 날것 그대로 악보에 나타날 리가 있겠는가.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이 역작에서 멘델스존의 행복한 감정은 1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 때문일까? 신은 멘델스존이 음악가로서 살아생전 누릴 최고의 영예를 아주 단기간만 허락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신이 끝끝내 주시지 않은 마지막 행복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멘델스존 “엘리야”는 개인적으로는 졸음운전 방지용 또는 분노 해소용으로 듣는 음악이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런 식으로 이 대곡을 듣는 나는 멘델스존에게 가끔씩은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지막 행복을 끝끝내 누리지 못했던 멘델스존의 심정 또한 200퍼센트 공감한다. 그건 그렇고, 난 이 곡을 아직 직접 라이브로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얼마나 큰 폭탄 같은 감동이 밀려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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