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마드뮤지션 Nov 07. 2019

종교음악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야 멋있다

비록 서양음악은 종교가 뿌리이지만…



 (지금은 안 나간 지 오래됐지만) 나는 교회에서 오랫동안 찬양팀에 몸담고 있었다. 그냥 몸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음악에 대한 관심이 찬양에 대한 관심으로도 옮겨가 찬양으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호주의 힐송교회 소속 컬리지에서 1년간 그들의 방식을 배워오기도 했었다. 그 후로는 개척교회의 반주자로 무려 8년을 활동했다. 특히 찬양을 배우러 호주행 비행기까지 탄 만큼, 그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남달랐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했다. 교회의 부조리에 눈을 뜸과 함께 이것이 제대로 된 음악으로 신을 찬양하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슬금슬금 생기기 시작했다. 천편일률적으로 부르는 찬송가는 구닥다리 같은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고 한때 열광했던 CCM도 점점 어떤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찬송가든 CCM이든 내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답답할 정도의 단순함이었다. 거기에 내용은 단순한데 뭔가 교조적으로 억지로 꾸민 듯한 느낌이 영 거북했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의 다양성과 자연스러움에 눈을 뜬 나에게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양들은 그저 단순하면서 소화불량 걸린 것마냥 거북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설령 교회 안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한들 이 음악들이 과연 교회 밖을 나가면 누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 편하지 않았다. 

https://youtu.be/38TS7EOGo9A

바흐 : 칸타타 147번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으로"

아놀드 쇤베르크 합창단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하던 내가 음악의 길로 급선회한 계기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라이브 공연으로 봤던 것이었다. 찬송가나 CCM을 부르거나 들어도 영 심드렁하던 내게 마태 수난곡에는 당장 방언이라도 받을 듯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니 문득 몇 곡 들었던 바흐 칸타타들이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들어본 칸타타는 사실 꽤 많았다. 다만 바흐의 칸타타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것들도 일부일 뿐이었지만. 어쩌면 엄청난 용자 짓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반주자로 봉사하던 개척교회에서 특송으로 마이라 헤스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 바흐 칸타타 147번의 합창곡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을 치기도 했다(목사님이 별 말 없으셔서 다행이었다!). 스스로 꽤 만족스러웠다. 연주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뭔가 신을 제대로 찬양했다는 손맛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곡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다. 미디어 매체에 다양하게 BGM으로 깔리는 곡이기 때문이다. 

https://youtu.be/97Twh_q8lQs

모차르트: 대미사 c단조 K.427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

몬테베르디 합창단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트


 일단 우리가 흔히 듣는 종교음악들을 살펴보자. 200여 곡이 넘는 바흐 칸타타들이 일단 눈에 들어온다. 이 많은 곡들을 전곡 다 들어 보지는 못했지만, 들어본 곡들을 기준으로 볼 때 100퍼센트 종교적이기만 하냐고 물어보면 답은 NO다. 지극히 다채로운 기법, 다양한 악기 조합의 사용, 솔로 악기들의 기교적인 명인기까지 바흐 작곡 기법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등의 대규모의 종교음악들은 더욱더 거대한 음악적 다양성이 있어 만인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시대를 좀더 뒤로 옮겨보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모차르트는 많은 미사곡을 쓰면서 자신의 주력 분야였던 오페라의 기법들을 노골적으로 종교 음악에 접목하여 진입문턱을 확 낮췄고(특히 c단조 대미사 k.427은 모차르트 스타일의 오버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토벤도 “미사 솔렘니스”라는 곡을 쓰면서 사실상 종교 음악이 아닌 콘서트용 작품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이뤄냈다.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는 말이 오라토리오지 사실상 오페라와 다를 것이 없으며, 브람스는 전례에 쓰이는 라틴어 대신 일상적인 독일어로 번역된 성경 구절을 써서 언어의 장벽까지 허물어버린 “독일 레퀴엠”을 써서 종교음악이 아닌 세속적 음악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즉, 평생을 투철한 신앙심으로 살았던 바흐부터 종교음악에서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감행했으며, 이러한 흐름은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수백 년 지나오는 동안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 한 가지만 소개한다. 전 유럽을 여행하던 불과 14세의 모차르트는 바티칸의 성 시스틴 성당에서, 그 성당 내부에서만 불려지고 외부로의 반출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던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단 한 번 듣고 기억에 의지해서 악보에 완벽하게 옮겨적어 성당 밖의 빛을 보았다. 그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말 일이 아니다. 모차르트라는 신내림을 받은 듯한 천재의 손에 의해 종교음악은 본격적으로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세속과 종교의 괴리감을 좁혀 주는 음악의 크나큰 능력일지도 모른다. 종교란 모름지기 세속에 녹아들어야 의미가 있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순간 불통과 부패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것이다. 그 간극을 좁히는 데 크게 기여한, 역사 속에 남은 대음악가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하는 바다. 멀게는 바흐로부터 가깝게는 브리튼(“전쟁 레퀴엠”을 쓴 현대 작곡가) 까지 말이다.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가 처절하게 내뱉는 한 마디 대사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 저는 천하의 개쌍놈일지언정 제 음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 인간이 완벽하면 신이 필요하겠는가? 불완전하고 추하기 때문에 신이 있는 것이지. 그렇기에 종교음악도 세상의 빛을 충분히 쬐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이 주시지 않은 마지막 행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