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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Nov 11. 2019

차이코프스키 실내악의 키워드, 추억

실내악에 담은 그만의 감성적인 추억팔이 



https://youtu.be/DLuNIMlnDo4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트리오 a단조 op.50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에밀 길렐스, 피아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레오니드 코간, 바이올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들은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다고 여긴다. 나 역시 동의한다. 광활한 러시아 대륙의 스케일 위에 입혀진 세련되고 섬세하며 애수어린 감성은 그 어느 누가 들어도 거부감이 없고 귀에 착 감겨 들어온다. 그런데 그의 실내악으로 들어가 보면,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비록 곡 수는 많지 않지만 그 중 무려 세 곡의 제목에 “추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피아노 트리오 a단조 op.50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현악 6중주 d단조 op.70 “피렌체의 추억”,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집 op.42 “소중했던 시절의 추억”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 “추억”이란 단어가 주는 감성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더군다나 상당수의 실내악의 제목에 이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 차이코프스키라는 작곡가의 음악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아주 중요한 키워드라고 여겨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또한 추억이라는 단어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교향곡 1번 g단조 op.13의 경우는 “겨울날의 꿈”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차이코프스키도 현실 세계 대신 뭔가 형이상학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에 깊이 탐닉한 인물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https://youtu.be/Tu0xedLCEOk

 차이코프스키 : 현악 6중주 d단조 op.70 "피렌체의 추억"

스베틀린 루세브, 클라라 주미 강. 바이올린

막심 리자노프, 최은식, 비올라

정명화, 리웨이 친, 첼로


 일견 이러한 면은 슈만의 그것과 꽤나 유사하게 느껴진다. 물론 음악들 자체만 놓고 볼 땐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비현실적인 세계에 탐닉했다는 점과, 감정이 음악 속에 솔직하게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 뚜렷한 공통점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추억 실내악 3종세트”는 다른 것 필요 없다. 문자 그대로 추억의 반추가 무엇인지 짙게 보여준다. 그냥 기억으로 묻어둘 법한 것들을 끄집어내고 때로는 곱씹으며 어찌나 고귀한 예술로 창조해 놓았는지. 이 곡들이 대규모의 관현악곡이 아니라 소편성의 실내악으로 쓰여진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하다. 추억이란 상당히 내밀한 감정이다. 이를 표현하려면 대규모보다는 소규모 편성의 밀도높은 앙상블이 훨씬 잘 어울린다. 이 세 곡의 악기의 사용 방법도 “추억”이란 단어를 머릿속에 넣고 생각해보면 뭔가 뚜렷하게 암시하는 것들 것들이 다 있다. 피아노 트리오 a단조의 경우는 피아노 파트가 튄다 싶을 정도로 극도로 화려하며, 따라서 피아니스트에게 매우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한다. 그리고 보통 실내악은 바이올린의 비중이 높은 경우가 많은데, 이 곡은 비르투오조스러운 피아노의 종횡무진과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애수어린 첼로의 맹활약에 바이올린이 뒷전으로 밀려버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구조로 작곡한 데는 배경이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절친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후 친구를 추모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이 곡을 썼다. 그런데 니콜라이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에, 이 곡의 화려한 피아노 파트는 친구에게 바치는 레퀴엠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언밸런스함이 원인이 된 슬픔이 느껴지는, 슬프면서 흥미로운 곡이다.  현악 6중주 “피렌체의 추억”을 살펴보자. 이 곡은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를 각각 두 대씩 쓴다. 그런데 여섯 대의 현악기용이라기에는 텍스처가 상당히 두텁다. 이 편성은 당시 동시대를 살고 있던 브람스가 남긴 같은 편성의 두 곡을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었는데, 이러한 편성을 파격적으로 쓴 것으로 봐서 마치 작은 밥그릇에 밥을 눌러서 담듯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에서 할 말이 너무나 많아 보인다. 이러한 두터운 텍스처 때문일까? 이 곡은 아예 현악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경우(악기의 편성은 같다)도 상당히 많고, 내가 느끼기에는 이렇게 연주하는 것이 오히려 차이코프스키의 의도에 더 근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다크한 캐릭터를 갖고 있던 러시아인 차이코프스키의 눈에 보인 밝디 밝은 피렌체의 모습을 보고 느낀 복잡다단한 양가감정이 이 곡 안에 녹아든 것일까? 지금까지 언급한 저 두 곡에 비해 “소중했던 시절의 추억”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단순하다. 포함된 네 곡 모두 바이올린이 음악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 역할만 하는 상당히 보수적인 스타일로 쓰여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음악의 분위기는 “추억”이란 단어를 역시나 강력하게 소환한다. 이걸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추억 한두 개쯤은 소환되리라. 그것이 첫사랑이든, 진탕나게 고생한 기억이든, 사업이 성공한 기억이든 말이다. 그렇기에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하면 앵콜곡으로 연주하기에 딱 좋은 곡들이다. 여운을 남겨주기 딱 좋을 곡들이니까.

https://youtu.be/h-cAJBK09uw

차이코프스키 : 소중했던 시절의 추억 op.42

클라라 주미 강, 바이올린

박진우, 피아노


 앞서 언급했듯,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실내악은 총 8곡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절반에 가까운 세 곡이 “추억”이란 단어를 담은 제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차이코프스키는 실내악이라는 플랫폼을 “추억팔이”로 활용했다는 증거다. 이것은 분명 성공했다. 이 곡들이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작들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진짜로 유명한 곡들(비창 교향곡,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1812년 서곡, 피아노 협주곡 1번 등)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내밀하고 섬세한 감성들이 가득한 곡들이기 때문이다. 이 “추억 3종 실내악 세트”야말로 차이코프스키 스타일 감성의 오버뷰라 할 수 있다. 특히 지금 이 늦가을의 감성에는 이만한 음악들도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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