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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Nov 14. 2019

시공을 초월한 고전의 힘

클래식vs아이돌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던 나는 타 장르 음악을 좀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배척한다는 것은 아니다. 주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또는 오고 가며 TV나 라디오로 다른 스타일의 음악들도 많이 듣는다. 당연히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다. 뭔가 뚜렷한 음악적인 개성이 느껴지거나, 섬세한 감성을 자극하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고 철학적으로 저격하는 내용이 있으면 나도 장르 구분 없이 좋아한다. 그러나 케이팝이라고 불리는 “트렌디한” 아이돌 댄스곡들의 경우 대부분 적지 않은 거부감을 가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때그때의 트렌드에 맞춰가는 군중심리에 대해 극단적이랄 만큼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반대의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내 또래 세대들은 1세대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H.O.T, SES, 젝스키스에 열광하던 세대다. 그들의 전성기는 지금부터 20여년 전이다. 그들의 노래를 지금 들어 보면 상당히 괜찮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때는 비로소 인정한다. 20년의 세월이 지나도 공감을 줄 수 있는 노래를 그들이 내놨던 셈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그들에게 미친듯이 열광하고 모였다 하면 그들의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곤 했었는데, 세월이 20년 이상 지나고 보니 가슴이 그들의 노래들을 가로늦게 받아들이는 체험을 적잖이 한다. 


 이렇듯 나의 음악관은 확고하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에 익숙해져서인지, 내게 좋은 음악이란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도 여전히 듣기에 좋은 음악이다. 이건 클래식 음악의 정의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클래식 음악이 뭔가?” 라고 물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워낙 포괄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영어 “classical”은 “고전적인”이라는 뜻이다. 문학에 대입해보면 쉽다. 몇백, 몇천 년이 지나도 전세계 곳곳에서 널리 읽히는 소설이나 시들이 고전문학인데, 우리가 아는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가 쓴 음악의 정의는 바로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다고 클래식 음악이 뭔가라는 질문에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라고 답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음악들이 어찌됐든 몇백 년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함이 음악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작곡가들의 명성과 살아생전에 대등하거나 능가하던 작곡가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보다 훨씬 더 많다. 바꿔 말하면 바흐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쇼팽도 생존 당시에는 트렌디 뮤직을 쓰던 작곡가들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출발선상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몇백 년을 살아남느냐, 1,2년 반짝하고 잊혀진 존재가 될 것이냐는 시간이 지나야 판별된다. 몇 년 전 고인이 되신 음악평론가 안동림 선생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명반이란 발매된 지 적어도 30년은 지난 것이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이 발언을 처음 접했을 때는 무슨 꼰대 같은 소리나 하냐고 그를 비난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클래식 음악의 정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수백 년을 끈질기게 살아남았냐를 고찰해 봤을 때 선생의 발언에는 아주 본질적인 통찰력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작곡된 음악이 그럴진데, 그 결과물인 연주도 말해 무엇하랴. 최근의 연주들을 보면 기술적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다. 점점 더 실수는 없어지고, 점점 더 입체적이고 정확한 템포가 삽입되고 있다. 이러한 연주의 트렌드는 오감을 정말 기분좋게 자극한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대 명인들의 그 대체불가능한 감성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 내게도 드는 강한 느낌이다. 예를 들면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이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왜 지금까지 추앙을 받겠는가? 전쟁통의 상흔도 이겨낸 웅혼한 감성이 베토벤의 역사적 가치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요즘의 기술적으로 진보한 연주들은 오감이 아닌 육감의 영역에 속한 감성을 만족시키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아이돌로 넘어가 보자. 그리고 시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0년 전의 아이돌 그룹이라면 원더걸스나 소녀시대가 얼른 떠오른다. 그 멤버들의 얼굴은 죄다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다들 너무너무 예쁘고 수려하니 기억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들은 솔직히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제목은 기억하더라도 음악이 어떤지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언론에서 그토록 “물고 빠는” 아이돌 케이팝의 실상이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멤버들의 얼굴 뿐이다. 한마디로 휘발성만 가득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케이팝 열풍이니 국위선양이니 하는 걸 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세계의 문화를 선도한다는 언론의 포장대로라면, 왜 이 나라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면 노벨상 수상자 한 사람 나오지 않는가? 나는 그 부분이 아쉽다. 언제 연기처럼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트렌디한 어떤 것보다, 지속가능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밝히는 그 어떤 것이 이 나라의 정신문화를 이끌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치 프랑스와 독일처럼. 꼭 음악이 아니어도 괜찮다. 모든 문화에 걸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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