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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Dec 03. 2019

슈만 피아노곡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는 없다?

가장 기계적이지 않은 음악, 슈만


https://youtu.be/22Uozp_5JiQ

슈만 : 사육제 op.9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피아노


 피아니스트로서 나의 꿈은 죽을 때까지 슈만의 피아노곡 전곡을 모두 연주해 보는 것이다(그만큼 슈만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 첫 걸음으로 나는 대학원 졸업리사이틀의 프로그램에 슈만의 대규모 역작인 판타지 C장조 op.17을 집어넣었다. 이 곡의 규모가 워낙 크고 난이도도 높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들어간 다른 곡들은 평소에 많이 쳤던 짧은 곡을 두 곡 집어넣어서 학교에 제출했다(그냥 이 곡에 “몰빵”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렇게 졸업연주를 마치고, 다른 곡들을 쳐봐도 내게 슈만만큼 가슴을 울리고 공감을 주는 작곡가는 없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슈만 피아노곡들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찾아서 들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어디에도 슈만의 피아노곡 전곡을 모두 녹음한 피아니스트는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전집을 낸 피아니스트만 해도 이름 나열하기가 버거운 베토벤과 역시 심심찮게 전곡 녹음을 한 피아니스트를 찾아볼 수 있는 쇼팽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물론 유명한 곡들을 따로 떼어 따져보면 정말 유명한 명연들이 많다. 예를 들면 리히터가 연주한 판타지, 호로비츠가 연주한 크라이슬러리아나,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어린이의 정경,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빈 사육제의 어릿광대, 켐프가 연주한 유모레스크, 폴리니가 연주한 다비드 동맹 춤곡 등등…그런데 이런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오는 전설적인 대가들조차 슈만 피아노곡 전곡은 단 한 사람도 녹음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쉬케나지, 키신, 켐프, 아라우 정도가 상대적으로 전집에 가까운 분량의 슈만 녹음을 남긴 정도다. 녹음 뿐만이 아니다. 라이브 연주에서도 베토벤 사이클은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고, 쇼팽만 집중적으로 연주하는 무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슈만은 아니다. 매우 드물다. 프로그램의 모든 곡을 슈만으로 채운 피아노 리사이틀을, 나는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피아니스트 문지영 씨가 슈만의 대곡 네 곡(아라베스크,판타지, 소나타 1번, 블루멘슈티케)을 프로그램에 꽉꽉 채워 예술의 전당에서 무대를 가진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 기분이었다!  슈만의 피아노곡들은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에 있어 중요도가 대단히 높고, 문헌에서도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름만 대면 바로 알 만한 전설의 대가들조차 슈만 피아노곡 전집을 남기지 않는다?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 원인을 한 번 고찰해보자.


어떤 유명한 클래식 음악 해설 프로그램에서,  예고생이 슈만의 피아노곡의 특징을 문장에 비유헸다. 다른 작곡가들의 피아노곡이 "나는 학교에 갔습니다"라는 식이라면, 슈만의 피아노곡은 "나는 학교에 갔는데 학교에 가는길에 하늘을 보니까 하늘이 무척 푸르르고, 길가를 보니까 풀들이 싱그럽고~"이런 식이다.”


 이 예고생의 말에 모든 것이 숨겨져 있다. 슈만은 오감의 영역으로 커버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뜻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슈만은 문학과 음악의 갈림길에서 고민했을 만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었고, 음악으로 완전히 길을 정하고도 문학의 요소를 음악에 대거 도입했다. 그리고 슈만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닌 분리된 두 개의 자아,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있었다(이 두 자아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정신질환이 온 것이다). 이 두 자아는 언제나 음악 안에서 같이 사이좋게 손잡고 가기도 하고,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자아는 또한 클라라라는 여인의 영향권 아래 모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즉, 슈만의 두 개의 자아는 모두 클라라를 사랑했다. 이러다 보니 외형적으로는 상당히 절제되어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진다. 장미꽃이 보기에 예쁘다고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대는 순간 날카로운 가시의 찔림에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슈만의 음악, 특히 피아노곡이 딱 그렇다. 꽃집 주인이 장미를 만지기 위해 두터운 장갑을 끼고 멀리서 관찰하고 장미의 특성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하듯이, 슈만을 치는 사람도 일단 큰 그림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이 큰 그림을 파악한다는 작업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연주에 들어가서도 슈만의 곡 안에는 유난히 암시적인 메시지가 많고, 아티큘레이션 처리가 매우 섬세하게 되어 있으며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이 뜬금없는 성부에 등장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단순히 손 잘 돌아간다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이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정신력이 소모된다. 그리고 각 곡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슈만이다”는 식의 일관성있는 방향을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리해서 설명하면, 슈만의 피아노 곡들은 바흐, 베토벤, 쇼팽의 그것처럼 방향을 하나로 잡고 전곡을 연주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이다. 여러 개로 흩어져 있는 뭔가를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려면, 어느 정도는 기계적인 도식화가 필요한 법인데, 슈만은 그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즉 철저하게 “기계적이지 않은”음악들이라는 것이다.

https://youtu.be/KB6uKVQsA00

슈만 : 판타지 C장조 op.17

손열음, 피아노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기계적이지 않은” 면이 슈만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무슨 감정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또한 감정을 풀어놓는 방식도 참으로 디테일하면서 다채롭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슈만의 피아노 곡들은 각 곡의 개별성과 또 해당 곡 안에서의 다양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전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력 소모를 동반한다. 이건 한 곡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체력이 힘든 것이 아니고 멘탈에 과부하가 걸리기 일쑤다. 기교적으로는 비교적 심플한 편에 속하는 “어린이의 정경” 조차도 전곡을 완곡하고 나면 몰려오는 정신적인 피로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면 때문에, 알파고가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이 절대로 제대로 연주할 수 없는 작곡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코 슈만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전곡을 연주해 보겠다는 꿈은 놓을 수 없다! 물론 전곡을 모두 무대에 올리거나 음반으로 녹음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나 혼자 연습하면서 전곡을 다 쳐보는 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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