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현재 30대 중반인 나는 특이하게도 처음 이름을 인식한 지휘자가 “제왕”이라고 불렸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아니라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였다. 그리하여 초두효과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건지, 나에게 있어 관현악곡의 기준은 무의식적으로 아바도로 잡혀 있었다. 시간차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바도의 연주들을 먼저 접한 뒤 카라얀을 접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가 알아봤자 얼마나 알았겠냐는 것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카라얀의 베토벤을 처음 접한 나의 인상은 “끝내주게 귀에 잘 꽃히게 연주하네”였다. 나중에 보니 이 첫인상은 나름대로 정확한 것이었다. 카라얀이 지휘한 연주들의 가장 큰 특징은 주선율(윗소리)을 매우 강조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지나자, 카라얀의 이런 뚜렷한 특성이 슬금슬금 싫어지기 시작했다. 논란거리가 된 바 있는 그의 몇몇 행적들(나치 협력 논란, 상업성 논란, 말년의 베를린 필 신입단원 기용문제 논란 등등)은 논외로 하고, 단순히 음악적으로 봤을 때 카라얀 특유의 주선율을 강조하는 해석 스타일이 결정적으로 싫어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군대 100일휴가 때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클래식 음악을 뒤로 하고 간 군대에서 내가 가장 그리웠던 건 집에 두고 온 수백 장의 음반들이었다. 100일휴가를 나와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아무거나 CD를 하나 골라 플레이어에 올렸다. 그렇게 내 손에 랜덤으로 걸린 한 장의 음반은 카라얀의 마지막 정규음반으로 알려진 빈 필과의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이었다. 그 순간이 너무 두근거렸고, 플레이어가 CD를 읽는 고작 1,2초의 시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음악이 시작되고, 나는 곧장 음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앉은 자리에서 열 번은 들을 것 같았는데, 3악장 중간에서 나는 갑자기 정지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뭔가 휑한 느낌이었다. 그 CD를 빼고 다른 앨범을 또 하나 랜덤으로 골라 재생했다(무슨 곡, 누구의 연주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빠져들어 완전히 몰입했다. 그런데 그래도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그렇게 좋았던 카라얀의 브루크너 7번이, 전곡을 다 듣지도 못할 정도로 별로였다니?
원인은 역시 주선율을 강조하는 카라얀의 뚜렷한 특성 때문이었다. 이런 스타일 때문인지 대규모 교향곡의 입체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전역한 뒤, 카라얀의 많은 음반들을 다시 들어 보았다. 그런데 뭘 들어봐도 100일 휴가 때 느낀 것 그대로였다. 솔직히 말해 카라얀이라는 이 무시무시한 이름값을 가진 거물에게 “사기를 당한” 느낌이었다. 물론 고전,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을 연주하는 데 있어 주선율이 잘 들리게 연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주선율이 아닌 성부들도 작곡가들이 그냥 장식품으로 써놓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화마저 났다. 당시 나는 혈기왕성한 20대 시절. 무슨 치기였는지 당시의 온라인 클래식 커뮤니티에 카라얀을 작정하고 비판하는 글들을 대거 올려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유치하고 치기어린 짓이었지만 말이다. 당연히 그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포화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의 본업이 피아노가 되었다. 아마 피아노 전공한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레슨을 받으러 들어가면, 선생님들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윗소리”를 강조한다. 그런데 피아노 연주에 오랫동안 공백기간이 있었던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는 들었으되 손가락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윗소리 내는 손가락은 십중팔구 힘이 약한 4,5번이다. 더군다나 이 두 손가락은 각자 독립된 근육을 사용하는 나머지 세 손가락과 달리 한 개의 근육을 공유하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독립”이 원천적으로 잘 되지 않는다. 이거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싫었던 카라얀의 존재가 역설적으로 이 문제의 돌파구가 될 줄이야! 어느 날, 연습을 하다 말고 먼지가 가득 쌓여 있던 카라얀의 음반들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싫었던 “윗소리 강조”를 주의 깊게 들어보았다. 뭔가 묵직한 느낌이 올 때까지는 크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내려진 결론. 윗소리를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필드가 다른 관현악곡 분야지만, 카라얀은 윗소리를 내주는 데 있어 뭔가 묵직하게 의식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투브에서 영상도 찾아 처음부터 다시 아주 주의깊게 보았다. 카라얀은 본래 눈 감고 지휘하는 습관이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있지만, 그의 손짓은 고정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항상 주선율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사실 피아노는 양손 두 줄의 악보만 커버하면 되지만, 지휘자는 수십 개나 되는 파트들을 모두 스캔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냥 듣기만 하기에 쉬워 보이지만, 그냥 보기만 해도 어지러울 정도의 복잡한 총보 안에서 주선율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강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정도 되니, 카라얀을 미워했던 그 전까지의 내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인정”을 넘어 카라얀이라는 인물을 존경하게 되어버렸다. 다시 카라얀의 연주를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레슨에 들어갔을 때, “윗소리를 강조하라”는 선생님의 코멘트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다. 뭔가 똑 부러지게 문장으로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카라얀의 연주를 들으며, 피아노 연주에서 윗소리를 어떻게 맛깔스럽게 강조하느냐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를 얻어간 것은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고 또 느낀 바가 있다. 총보를 보면서 카라얀의 연주를 들어보니, 내가 과거에 인식했던 것처럼 주선율을 살리려고 나머지 성부들을 뭉개버리는 지휘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복잡한 악보로 악명 높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악보를 보면서 들어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주선율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비율로 블랜딩을 절묘하게 했다는 것이 더 마땅한 표현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악보를 보면, 각 파트들이 따로 놀면 소음공해가 되기 딱 좋게끔 되어 있다. 우선순위와 후순위를 정해 블랜딩을 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데, 다른 연주들을 아무리 들어보아도 카라얀만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균형감있게 해석한 연주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카라얀이라는 이 거물의 무시무시한 명성에 값하는 존경을 비로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상태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복잡한 과정으로 쓴 글이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카라얀이라는 인물이 괜히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무려 35년동안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외적인 논란들은 논외로 하자. 그가 음악사에 아로새긴 이 엄청난 업적들은 결코 과소평가할 것이 못 된다. 나처럼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강력한 영감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지휘자가 동서고금 카라얀 외에 누가 있겠는가? 약간은 꼰대 같은 워딩으로 마무리해보도록 하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