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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Dec 18. 2019

나는 질서속의 자유에 희열을 느낀다

나의 방향성, 질서 속의 자유


 최근에 라벨 소나티네의 악보를 읽어 보았다. 그런데 라벨은 내가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던 작곡가다. 이유는 너무 차갑고 기계적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드뷔시는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라벨은 뭔가 정이 안 갔다. 그러던 나에게 우연한 기회에 어떤 모임에서 대학원 졸업 리사이틀 이후 처음으로 스타인웨이로 연주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 모임에 참여한 한 사람이 드뷔시를 세 곡 연주했다.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너도 나도 다음에는 꼭 드뷔시를 쳐야겠다는 말들이 나왔다. 그런데 남들이 전부 드뷔시를 친다고 나까지 시류에 휩쓸리고 싶지는 않아서, 대안으로 드뷔시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주의 작곡가 라벨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 스타인웨이의 소리라면, 라벨도 드뷔시만큼 매력적인 소리를 내겠다는 확신이 섰기에.

https://youtu.be/FBdtGInoH7A

라벨 : 소나티네

유은서, 피아노


 일단 악보를 구해 보면대 위에 올려 놓고, 조금씩 악보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곡은 소나티네를 골랐다. 라벨의 모든 피아노곡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심플한 곡이기 때문이다(라벨의 피아노곡들은 거의 대부분이 고난도의 테크닉을 맑은 소리로 표현해야 하는 난곡들이다). 그런데 조금씩 악보를 읽어 나가면서 라벨에 대한 내 생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흉내라도 내겠나 싶었는데, 의외로 손에 착착 붙는다. 내가 자리잡아 놓은 연습실에 드나드는 유학파 피아노 강사가 깜짝 놀라면서 “라벨 엄청 잘 치시네요”라고 말하고 가기도 했다. 직접 손을 대본 라벨은 나의 선입견처럼 결코 차갑고 기계적이지 않았다. 물론 쓰고 있는 틀이 상당히 고전적이고 단정한 건 맞지만, 그 틀 안에 라벨이 구사한 화성과 진행은 정말 센스가 있고 세련미가 넘쳤다. 한마디로 내용은 자유로움이 넘쳤다. 고대의 교회 선법을 이렇게 자유롭고 세련된 방식으로 가지고 놀다니! 이런 자유롭고 세련된 화성이 내 손끝에 전해지니 상당히 새로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라벨 소나티네를 쳐 봄으로써, 나는 내 취향을 비로소 정확하게 알게 됐다. 나의 취향은 바로 “질서 속의 자유”였다. 즉 큰 틀은 질서정연하고, 내용은 자유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Big 5 작곡가는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다. 질서 속의 자유란 특징은 이 다섯 명이 정확하게 공유하고 있다. 다섯 명 모두 질서정연한 큰 틀이 있는 가운데 내용적으로 표현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자유가 내포되어 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보여주는, 수학 공식을 대입해도 정확하게 떨어지는 치밀한 큰 그림 안에서의 무한한 범용성, 소나타 형식의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가운데 베토벤의 희로애락이 솔직하고 자유롭게 드러난 32곡의 베토벤 소나타들, 역시 빈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면서 마치 배낭여행객처럼 끊임없이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야생동물이나 나무 따위와 대화하는 듯한 슈베르트, 역시 단정한 겉옷을 입고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지극히 격한 감정을 감성적인 에세이처럼 끊임없이 풀어내는 슈만, 너무 틀이 확고해 언뜻 들으면 꼰대 같지만 전혀 뜬금없는 내성부에 자신의 부드럽고 따뜻한 내면을 숨겨놓는 진정한 “츤데레” 브람스…. 여기의 연장선상에서 라벨도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 겉옷은 엄격한 틀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그 프레임 안에 채워넣는 “자유의 아이콘” 프랑스 인상주의의 정점의 감성.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순인가. 


 반면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어려워하는 작곡가들도 있다. 하이든과 쇼팽이다. 하이든의 경우는 틀도 엄격하고 내용도 엄격하다. 특히 내용적으로 너무 틀에 박힌 감이 없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작곡가다(아이 혼내는 부모님 같은 느낌의 엄격함이 아니라, 직장인 감성이 느껴지는 엄격함이다). 무려 30여 년을 별다른 “대과 없이” 에스테르하지 가에서 충성스럽게 일했던 그의 무던하고 사회생활에 능한 인성에 기인하는 면이라 볼 수 있다. 쇼팽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는 반대로 틀이 자유롭고 내용이 까다로운 편이다. 나에게 있어 그냥 들을 때 좋은 곡은 수없이 많은 작곡가가 쇼팽이다. 그런데 연주해 보면 다르다. 쇼팽은 각각의 패시지, 프레이즈에 엄청난 꼼꼼함과 유연함이 동시에 필요하고 음 하나하나에 의미부여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자유로운 줄 알고 들어왔다가 완전히 피를 보는 작곡가다. 나만의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쇼팽을 연주할 적에는 세부에서 큰 틀로 가는 방향의 어프로치가 필요하다. 이러다 보니 내가 피아노를 치면서 트라우마(?)가 남은 기억은 전부 쇼팽과 관련된 기억이다. 대학원 첫 학기에 쇼팽 발라드 1번을 치면서 레슨 받을 때 혼만 났던 기억, 에튀드 op.10-4 “추격”을 연습하다가 옆방에서 연습하던 예고생에게 “쌤! 그렇게 치면 다 틀리는 거 알죠?”라는 말을 들었던 굴욕적인 기억 등등…어찌 됐든 하이든과 쇼팽은 내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질서 속의 자유”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란 느낌이다. 


 한때는 내가 피아노를 치는 이상 슈만, 브람스만 치고 싶었던 때도 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안 좋은 것이다. 사람이 밥을 먹을 때도 편식이 안 좋은 것처럼, 피아노도 편식하는 것처럼 치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물론 여전히 슈만의 전곡을 죽을 때까지 모두 치는 건 나의 목표다. 그렇지만 “질서 속의 자유”라는 큰 방향을 잡고 되도록이면 시대별로 골고루 치려고 노력하자고 마음을 다져 본다. 바흐-베토벤-슈만-브람스-라벨로 이어지는 라인업이라면 뭐 시대별로 골고루 안배된 셈이지 않은가. 축구에 비교하면 어떤 감독은 점유율 축구를 추구하고, 어떤 감독은 선수비 후역습 축구를 추구한다. 그런데 감독이 어떤 전술을 쓰든 적시적소에 다양한 유형의 선수를 적절하게 기용해야 감독이 추구하는 전술이 완성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듯이, 나도 컨셉을 잡았으면 시대별로 다양하게 쳐보는 것이 내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뭐 좀 용두사미격인 결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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